13월에 피는꽃---2
저녁을 먹고 밤늦게까지 거실에서 모친과 같이 있다가 명선은 2층으로 올라왔다. 저녁을 먹는동안 부친
은 식탁에 앉자마자 몇숟갈 드는가 싶더니 입맛이 없다며 안방으로 들 어가 버렸고 그런 부친의 모습을
보는 명선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성현은 아버지와 명선의 침묵전선에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보
는것이 습관이 되어버렸고 모친 은 부녀간의 설전과 냉기류에 이젠 관여치 않겠다는 듯이 철저하게 무관
심으로 일관했다. 명선은 방에 들어와서는 불도 켜지않고 한동안 문에 기댄체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
았다. 퇴근할 무렵의 상쾌한 기분은 꿈결처럼 아득했고 온통 희뿌연 안개속을 헤메는듯한 암울함이 가슴
가득 차오르고 있는것만 같았다. 명선은 한숨인지 깊은 호흡인지모를 뜨거운 숨을 한번 뱉어내고는 컴퓨
터앞에 앉았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유명포털싸이트 클래식 음악 동호회 카페를 한번 훍어보고는 바탕화
면에 깔린 메신 져를 클릭했다.
“계세요?”
쪽지를 보낸 명선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모니터 우측 하단 시작줄에 깔려있는 시계를 바라보
았다. 11시 2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가 기다리다 잠들어 버린 걸까? 명선은 웬지모를 우울함이 엄습해
오는것만 같았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사이버속의 인물, 그사람에 관해 알고 있는것은 남자라
는 사실과 아직 미혼이라는것 뿐이었다. 명선은 무심할만큼 조용한 모니터를 팔장을 한 채 오랫동안 실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간절한 바램이었을까. 어느순간 뿅하는 소리와 함께 쪽지가 떴다.
“정야님, 설마 기다리신건 아니죠?”
“아..아뇨, 금방 들어왔어요.”
남자의 말에 명선은 시치미를 뗐다. 20분전에 보낸 쪽지에는 시간까지 적혀있을테지만 자존심은 아무때
나 본능적으로 발동한다.
“정야님, 카페에 들어가보셨어요?”
“녜, 금방 들어갔다 왔어요. 오늘은 조용...하더군요.”
“금방 카페에 글 올렸어요. 시간나면 읽어보세요.”
“녜, 알았..어요.” 얼굴없는 사내는 항상 카르딜로의 `CORE`NGRATO(무정한 마음)` 를 배경음악으로 깔
고 클래식음악에 얽힌이야기를 올린다. 이야기의 주제는 매번 달라도 배경음악은 언제`CORE`NGRATO`
였다. 가끔 명선이 즐겨듣는 쇤 베르크의 대표작인 정야(淨夜)를 올릴때 도 있었다.
“지금 집입니까?”
“아뇨, 서울 부모님 집이예요.”
남자는 항상 지금 있는곳이 어디냐고 묻는것이 버릇이 되어버린듯했다.
딱히 할말이 없음을 의미하는 지극히 따분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명선은 항상 성의껏 대답했다.
“어쩐일로 주중에 부모님 집에 가셨어요?”
"그냥....모르겠어요. 차없이 막상 집에 갈려니 막막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에라 모르겠다 그 런 생각이
들면서 무작정 택시를 잡아탔어요. 그리곤 그냥 서울로 오고 말았어요. 아침 출 근길에 접촉사고를 당해
차가 많이 망가져 정비공장에 가 있거든요. 그래서 기분도 꿀꿀하 고 해서...“
“그랬군요. 몸은 괜찮아요?”
“녜, 산만한 화물차가 뒤에서 받았는데 목이 좀 아프더라구요. 지금은 괜찮은데 내일 아침 에 일어나면
또 아플지도 모르겠어요.”
“화물차에 받혔...어요?”
“녜, 아주 큰 화물차, 기사가 졸았나봐요.”
“그랬군요...”
“녜...”
“아버지와의 관계는 요즘 어때요? 아직도 냉각기입니까?”
“조금.. 그래요. 하루이틀이 아니지만 아버지는 저를 보시면 답답하신가 봐요. 하나뿐이 딸에 대한 실망
감이 어떤지 저도 알것 같지만 아버지의 속마음을 다는 헤아릴수가 없어요. 간혹 저도 어떤때는 후회가
들기도 해요. 그냥 아버지 말씀대로 교대나와 선생님이 되거나 아니 면 두눈 딱감고 아버지가 근무하시
는 회사에 들어갔다면 제가 초라하지도 않을거고 아버지 와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을텐데 하는 후회가
들어요. 그렇지만 아버지 바램대로 하기는 정말 싫었어요. 아버지 회사에 입사하는것은 생각할수도 없었
고 그럭저럭 사회생활하다가 결혼하는것도 그렇고 당시 제게는 용납할수 없는 일이었어요. 문제는 아버
지와 저와의 현격한 현실인식의 차이는 어쩔수 없다치더라도 제가 처한 상황이 자꾸만 아버지와 저사이
의 갈등의 골을 깊게만 한다는 거죠....돌파구는 보이지 않고.....그렇지만 그래도 자존심은 있 어가지고
아버지앞에서는 고개빳빳히들고 태연한척해요.”
“아버지가 정야씨의 현실을 인정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겁니다. 아버지의 실망감이 오 랫도록 생채
기로 남아있고 지금도 여전한건 그만큼 부녀간의 정이 두터웠었다는 반증이죠. 두터웠던 정만큼 실망감
은 커져가고.......”
“......”
“지금 근무하시는 부서가 어떤 부서인지는 모르지만 공채로 뽑은 사원을 배치하자마자 곧바로 엉뚱한 곳
으로 발령내는 회사인사시스템도 상당히 문제가 있는것 같군요. 아마도 정야 씨 아버지는 대기업간부로
서 그러한 인사방식을 이해 못하실겁니다. 그런 회사에 몸담고 있 는 정야씨에게서 아버지께서는 희망같
은게 안보이시는지도 모르죠.”
“저도 그런생각 안해본건 아니지만 돈 유안님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무리 불황이지만 인사에 원칙이 없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군요. 그래서 정야씨 아버지는 정야씨의
미래가 불안한것일 겁니다. 그렇게 원칙없는 회사에 뭘 기대할수 있겠냐하는 식이죠.”
핵심을 짚어내는 얼굴없는 사내의 말에 명선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 딱히 대안이 없거든요.”
“오늘 아버지께서는 무슨 말씀 하시던가요?”
“....지금도 늦지않았다고 아버지 회사에 들어오라는데 저는 한사코 거절했어요. 조금은 충격이었어요.
아버지는 제가 지금 다니는 회사에 입사하고부터는 절대 그런 말씀을 안하셨거던요. 그런 말씀 하실분도
아니시거던요.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아버지회사에 입사하지 않은건 아버지 배경을 업고 입사한 낙하산
이란 소리를 듣기 싫어서 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상황 이 악화되었는데...그래서 이제는 들
어가더라도 정말 아버지 백으로 들어갈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데 제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수 있겠어
요."
“... 대안이 없다면 싫다고만 하실일이 아니잖아요. 아버지백으로 입사하지 않았다는걸 능력 으로 증명해
보이시면 되잖아요.”
“그...그게 그렇긴 해요.”
명선은 남자의 말에 달리 반박할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는 항상 명선이 변명을 못할정 도로 허점을
파고든다. 어떤때는 말이 너무나 논리정연하고 빈틈이 없어서 열등감과 함께 대화에 한계를 느낄때도 있
었다. 그렇지만 명선은 남자가 싫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그것은 남자의 말을 듣고 나면 답
답하던 가슴이 확 뚫리는 것 같은 시원함이 느껴 지기 때문이었다. 명선이 돈유안이란 남자를 알게된건
클래식 카페 에서다. 불과 5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명선 은 고민이 있으면 남자에게 털어놓곤 했었고 남
자는 그때마다 꼬박꼬박 말상대가 되어주곤했다. 카페란게 대개 그렇듯이 간판은 그럴듯하지만 어느정
도 친분이 쌓이면 잔잔한 일상사를 주 고받는 대화의 장소로 바뀐다. 처음에 이 남자는 꿔다논 보릿자루
처럼 대화에 끼지 않고 일주일에 서너번씩 자료실에 들러 클레식관련 자료만 올려놓고 사라지는것이 전
부였다. 혼자 잘난척하나 싶어 명선은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것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서
차츰 남자가 올린 자료를 보게 되었고 남자가 올리는 자료는 명선을 클래식음악에 더 심취하게 만들었
다. 그가 올리는 자료는 대걔 곡이 탄생하게된 배경과 곡에 얽힌 내용을 이야기식으로 옮긴것이 대 부분
이었다. 무작정 듣는것 보다 곡이 탄생하게된 배경을 이해하고 들을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러던 어느
날 명선은 남자에게 쪽지를 보냈고 남자와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버지 말씀을 한번 신중히 생각해 보세요. 저는 뭐라 말씀 못드리겠네요. 정야님의 소중 한 미래, 그건
전적으로 정야님이 결정해야하는겁니다.”
“녜. 말씀 고마워요. 한번 생각해볼께요.”
명선은 어느새 남자의 말에 동의를 하고 있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아는거라곤 남자라는 사실과 돈
유안이란 닉네임이 전부인 남자에게 아버지도 꺽지못한 자신의 고집이 흔들리 고 있었다. 명선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돈 유안님, 뭐하나 물어봐도 돼요?”
“무슨 말씀...이세요?”
“회사 감사에 관한 건데요.....”
“감사요?”
“녜. 우리회사가 지금 내부감사중이거든요. 감사란 말을 들으면 겁부터 나는데 감사의 목적 에 대해서 알
고 계세요?”
“왜요, 공금유용이라도 했어요?^^”
“그건 아니고...그냥 감사받는다 생각하니까 불안해서요.”
“내부감사를 보통 자체감사라고도 하죠. 감사의 목적은 한마디로 각각의 조직단위가 직무를 제대로 수행
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것입니다. 또한 회계제기록이 경영활동에 관하여 공정하고 정확하게 작
성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검토하고 평정하여 경영관리에 활용하고 내부 통제의 일환으로 이용하기도 합
니다. 옛날에는 자체감사의 영역이 회계감사에 국한되었으나 오늘날에는 판매, 제조, 보관, 노무등 기타
여러업무를 포괄하는 감사에까지 확대되는 추세 입니다.“
“마....많이 알고 계시네요.”
“뭐...전공이 그쪽이다 보니...”
“그...그래요.”
“정야님, 너무 걱정마세요. 입사한지 이제 1년된 사원한테 재정상태가 어쩌구 경영상태가 어쩌구 하는
말은 안나올겁니다. 그러니 맘 푹 놓으세요. 그리고 잘하면 회계감사에서 끝낼 수도 있어요. 회계감사는
언제하나요?”
“회계감사에서 끝날수도 있다구요?”
명선은 남자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부비리로 인한 특별감사일지도 모른다는거죠. 그런경우에는 대걔 회계업무와 관련된거니까 회계감사
에서 끝날수도 있다는거죠.”
“그..그래요? 회계감사 오늘 했어요.”
“그럼 한번 기다려 보세요. 다른부서 감사는 안할수도 있어요. 정야님 업무가 회계와 관련 된 부서는 아
니죠?”
“녜, 그건 아니예요. 하지만 안한다구 피해갈수는 없잖아요.”
“아무래도 큰 잘못을 한것 같군요^^;”
“재고가 좀 많이 쌓여 있어서 그래요.”
“그..그래요?” 자재과에 근무한다는 것을 명선은 에둘려 표현하려했지만 재고란 말이 불쑥 나오고 말았
다. 명선은 웬지 초라해지는기분이 들어서 여태껏 남자에게 자재과에 근무한다는 말을 하지않고 전공과
무관한 부서에서 일한다고만 말했었다..
“어떤... 자재죠?”
남자의 말에 명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음료원료같은...거요.”
“부패할것 같아서 걱정이 되셔서 그러시는군요.”
“녜, 그래요.”
명선은 이왕 여기까지온거 할수없다 싶어 단숨에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가벼운 잔소리는 듣겠지만 크
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요즘 보관시설이 다 첨단인데 뭘 걱정하십니까.”
“그래도 상사가 걱정을 많이 하니까 불안하기 그지 없어요. 아직까지 이런일이 없었거든 요.”
“직속상사는 입사한지 얼마나 됐어요?”
“직급이 차장이란 사람인데 천안공장에 있다가 몇개월전에 왔어요. 그 때는 영업부에 있었다고 들었어
요.”
“그럼 그 사람도 아직 식품자재 관리에 대해서 잘모르고 있을겁니다. 원자재란것이 딱 맞아떨어 지는 숫
자처럼 오차없이 관리하는건 무리입니다. 자재란건 생산공정에 차질이 생기면 누적 이 되기도하고 라인
이 잘돌아가고 매출이 증가하면 또 오금이 저려오기도 하고 뭐 그런겁니 다. 이래도 고민 저래도 고민인
것이 자재관리입니다. 그러니 편하게 생각하세요. 원리원칙이 중요하지만 뜻대로 안돼는게 또한 원리원
칙입니다. 모르긴해도 상사분은 전임자에게서 자재관리를 철두철미하게 하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
록 들었을겁니다. 그래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을겁니다.“
“저..정말 그럴까요?”
명선은 남자의 말에 안심이 되기도 하면서 설마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남자의 이어지 는 다음말에
뛰는가슴이 진정되는것만 같았다.
“정야씨, 사실 저도 그계통에 있어봤어요. 그러니 걱정마세요. 제가 장담할께요. 아무일 없 을겁니다.”
“저..정말 님도 이런계통에서 일해보셨어요?”
자신과 같은 계통에서 일해봤다는 남자의 말에 명선은 막혀있던 숨통이 트이는것처럼 시원 한 느낌이 들
면서 마음이 안정되는것만 같았다.
“직접 자재관리를 한건 아니지만 당시 제가 여러부서를 총괄하고 있어서 좀 알고 있습니 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좀 진정이 되는것 같아요. 힘이 되어주셔서 고마워요.”
“별거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는바를 말씀드린것 뿐입니다.”
“아뭏든 고마워요. 새삼 님을 알게된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명선은 눈물이 핑 돌정도로 남자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처음에는 마음의 벽을 쌓으며 철저 하게 사생활
에 보호막을 쳤으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랑비에 옷젖듯이 서서히 남자에 게 자신의 일거수 일투
족을 말하기에 이르렀고 작은 고민에서부터 아버지와의 갈등까지 모두 털어놓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명선과는 달리 남자는 자신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으려 했다. 명선은 온갖 구실을 갖다부쳐 남자의 속내
를 들여다 보려고 했으나 남자는 요지부동 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닫아버린 남자에게 명선은 자신의 얘
기만 하게되었고 남자는 명선 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카운셀러가 되어가고 있었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튀어오르기전의 잔뜩 웅크린 용수철처럼 사무실의 분위기는 적막감 이 멤돌고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감사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오전 어중간한 시간쯤에 감사위원들이 구매과
에 들이닥쳤 다. 우연이었을까, 얼굴없는 남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들려오는 얘기
는회계담당 과장의 비리소식이었다. 지출내역서를 부풀리는 수법으로 장부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그 횡
령액이 수억에 이르렀다. 그 과장은 이미 감사 이틀전에 사표를 내고 종적을 감춘 상태였다는 것이다. 감
사위원들은 굳은 얼굴로 서류이것저것들을 요구했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듯이 구매장부를 들추고 있었다.
박차장은 한쪽 구석에 팔장을 하고 긴장한 얼굴로 서있었고 명선과 인숙, 석현은 다소곳한 자세 로 감사
위원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감사위원들은 오랫동안 아무말없이 컴퓨터와 서류만 뒤적거리고 있
었다. 말없는 그들의 행동에 명선은 가슴이 더욱더 조여드는것만 같았다. 그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져
차라리 욕이라도 얻어먹고 각오하고 있으라는 말을 듣는것이 나을것만 같았다. 그렇게 심장이 오그러들
것 같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오랫동안 구매장부를 들여다보고 있던 세명의 감사위원중의 한사람이
입을 열었다.
“서류상의 재고와 실지 창고에 쌓여있는 재고가 맞습니까?”
남자의 말에 세사람은 한동안 서로 쳐다보며 머뭇거렸다.
“녜, 맞습...니다.”
대답을 한건 인숙이었다. 인숙의 이마에는 이슬같은 땀방울들이 가득 맺혀있었다.
“재고를 확인안해봐도 되겠죠?”
“의심나시면 해보세요. 어제 회계감사한거 하고 맞춰 보시면 되잖아요. 그럼 지출내역을 확실히 알거 아
녜요.”
“근데 재고가 너무 많은것 아닙니까?” “........” 남자의 말에 인숙은 뭐라고 대꾸해야할지 몰라 망설이는
지 입술을 깨물며 초조해 하고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요?”
남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인숙을 쳐다보았다. 남자의 무덤덤한 표정에는 위압감이 배어나오 고있었다. 명
선이 앞으로 나섰다.
“녜, 재고가 좀 많은건 사실인데 보관시설도 첨단이고 해서 대부분 장기간 놔둬도 변질될 우려가 없는 것
들입니다. 요즘 하도 매출이 들쑥날쑥하는 바람에 비축물이 좀 많아진것 같 습니다. 다음부터는 이런일
이 없도록 세심한 신경을 기울이겠습니다.”
명선의 말에 남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한번 끄떡이고는 장부를 계속들여다보 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멈춰버린듯 무거운 안개기운같은 침묵이 층층히 쌓여가고 있을무렵 오랫동안 꼼짝을
않고 있던 사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감사위원들은 눈 하나 깜짝않고 하던일을 계속하고 있
었으나 명선, 인숙, 석현, 박차장의 시선은 사무실을 들어서는 감색정장차림의 남자에게 쏠리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는 남자를 보던 명선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구매정산일지를 떨어뜨릴뻔했다. 어제 승강
기안에서 본 그 남자였다. 남자는 사무실을 한번 휘둘러보고는 천천히 사무실 안쪽으로 걸어왔다. 재석
과 눈이 마주친 명선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장부를 뒤적이던 감사위원한사람이 재석에게 다가가 재석에
게 귀엣말로 뭔가 를 속삭였다. 재석은 감사위원의 말에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고 박차장을 불렀다. 박차장
은 쭈뼛거리며 재석에게 다가왔다. 재석은 무슨말인가 박차장에게 하고는 감사위원들과 마치 썰물이 빠
져나가듯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감사는 그렇게 끝났지만 명선은 찜찜하기 그지 없었다.
“박차장님, 뭐래요?”
잔뜩 긴장해 있던 인숙이 감사팀이 나가자 마자 입을 열었다.
“이따 부사장실로 좀 올라오래.”
“그냥 여기서 시원하게 욕이라도 해주면 차라리 낫지 뭣하러 또 불러. 그리고 한창 감사도 중 갑자기 나가버리는건 또 뭐야.”
“글쎄....”
“근데 차장님, 아까 그 젊은 남자가 회장님 아들 맞죠?”
“그래,맞아.”
“난또 백마탄 왕자쯤으로 생각했는데....”
인숙은 실망스럽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명선은 어제 승강기안에서 본 남자가 회장아들일것이 라는 막
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남자가 회장아들이라는것을 알게 되자 묘한 기분이 들 었다. 더군다나
그남자가 입사면접때 알고 있던 자신의 이름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는것이 믿기지 않았다. 퇴근무렵
재석에게 불려갔던 박차장이 싱글벙글웃으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명선은 그런 박차장 의 얼굴을 보자 감
사결과가 나쁘게 나온건 아닌것 같아서 적이 마음이 놓였다. 인숙과 석현도 똑 같은 마음이었다. 퇴근후
저녁을 사겠다는 박차장의 말에 따라 명선과 인숙,석현은 회사근처 고기집에 모였다.
“차장님, 대체 어떻게 된거예요? 별일 없었어요? 어서 말씀해 보세요.”
자리에 앉자마자 인숙이 궁금한듯 박차장을 다그쳤다. 박차장은 재석에게 불려간후의 얘기를 늘어놓았
다. 역시 문제는 과다한 재고보유가 문제였고 재석이 재고가 많다는 얘기를 꺼 냈을때까지만해도 박차장
은 긴장을 했으나 재석이 성남공장의 재고를 적당히 남기고 천안공 장으로 내려보낸다고 말할때는 마음
이 놓였다.
“왜 천안공장으로 반출시킨대요?”
“요번에 중국수출물량이 갑자기 늘었대, 나머지 재고 일부를 천안공장에서 소화한데. 얼마 나 다행한 일
이야.”
“불황이라 영업안된다고 길길이 뛸때는 언제고 갑자기 물량이 늘어났다니....이럴줄 알았다 면 쫄지 않는
건데 이렇게 허탈한 기분은 또 뭐람.”
인숙은 투털거렸지만 어쨌든 감사를 그런대로 무사히 넘긴것같은 안도감때문인지 그들은 건배를 했다.
명선은 콜라만 마셔도 취하는 듯했으나 오늘은 취기가 돌지 않았다. 상당한 주량의 인숙은 매번 회식때
면 꼭지가 돌정도로 마시는통에 그 뒷감당은 매번 명선이 몫이었다. 명선은 눈이 풀려가는 인숙을 보고
있자니 오늘도 부축해서 집까지 바래다 줘야할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인숙은 명선이 말리는것에
아량곳않고 기분에 취해 술에 취해가고 있었다. 박차장도 술을 이기지 못하는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늘은 제대로 마시는것 같았다. 석현이는 술을 마시는지 어쩌는지 자세히 지켜보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
지 모를정도로 조용했 다.
“차장님, 뭐좀 물어봐도 돼요?” 술자리가 무르익어가고 있을쯤 몇 번씩이나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던 인숙
이가 혀꼬부진 소리 로 박차장에게 말을 건넸다.
“왜, 2차 가자구?”
“그게 아니고 어제 있잖아요....”
“어제 뭐?”
“어제 국제금속에서 켄 납품하러온 김 뭐라는 사람있잖아요.”
“김현수 말하는 거예요?”
“녜, 맞아요.”
“근데 그친구는 왜? 가만보니 인숙씨가 현수한테 관심이 많은 모양이네. 어제도 관심있어하 는것 같았는
데”
“관심요? 그냥 본능같은거죠 뭐. 정말 궁금한건 원초적관심같은게 아니고 명문대 졸업한 엘 리터가 어떻
게 그런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는지 그게 더 궁금해요. 차장님은 아실거 아녜요.”
인숙의 말에 박차장은 내친김에 말한다는듯이 입을 열었다. 명선은 아침에 일어나자 목이 좀 뻐근한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그남자를 잠시 떠올렸으나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었다. 하지만 인숙이 불쑥 그남
자 얘기를 꺼내는 통에 다시 그남자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는것만 같았 다. 박차장의 얘기는 명선에
게 있어서 뜻밖이었다. 그 남자는 대학졸업후 미국유학중 거액의 몸값을 받고 명성그룹에 스카웃되었다
는 것이었다. 박차장의 명성그룹이란 말에 명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으나 이어지는 박차장의 말속에는
계속 명성그룹이 등장했다. 박차장이 말하는 명성그룹은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입사한지 1년만에 사장과 한바탕 싸우고는 그만뒀다고 한다. 이대목에서 박차장은 자세히 얘기하
려는걸 꺼려 했다. 그냥 그렇게들 알고 있으라고 하면서 그남자에 대한 얘기를 접었다. 명선은 그남자가
명성그룹에 다녔다는 사실이 묘한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었다. 인숙은 그남자 가 계속 화물차를 몰고 납
품올지 모른다며 그 남자에 대해 더 알고 싶어했으나 박차장은 더 알면 피곤하다며 입을 닫아버렸다. 박
차장이 입을 닫아버리자 한동안 엉뚱한 화제에 몰입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기가 싶지 않아서인지 다들
술잔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제가 중요한 정보를 하나 얘기할까요?” 침묵을 깬것은 석현이었다. 석현은 오랫동안 혼자서 술잔을 홀
짝이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 다. 그도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이 술에 취해가고 있었다. 석현의 뜬금없는
말에 세사람을 귀를 쫑긋했다. 석현은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는듯이 담담한 표 정을 지으며 얘기를 꺼냈
다. 그의 얘기로는 조만간 인사이동이 있을것이며 부서통폐합이 있을거라고 했다. 박차장과 인숙은 니가
어떻게 아냐며 못믿겠다는듯이 빈정거렸지만 석현은 믿든지 말든지 그것은 댁들 이 판단하라며 말을 잘
라버렸다. 인숙은 어디서 흘러나온 정보냐고 따졌지만 석현은 고위급간부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며 자
신은 우연히 들었다고 했다. 명선은 반신반의 했지만 기대감과 불안감같은것이 교차하는것은 사실이었
다. 계속되는 불황의 여파로 다시 감원과 통폐합의 회오리가 휘몰아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어쩌면 원
직으 로 복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같은것이 뒤엉켜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그것은 박차장과 인
숙도 마찬가지였다. 석현의 말은 다음날이 되자 모두들 잊어버린듯했다. 다들 취중에 한 얘기고 취중에
나온얘기라 크게 염두에 두지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인숙은 어제 자신이 무슨 실수가 없었냐며 명선에게
묻 곤했다. 박차장은 석현에게 어제 한얘기 사실이냐며 묻자 석현은 황당하게도 오리발을 내밀었다. 전
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거였다. 며칠후에는 아예 입밖에 꺼내는 사람조차 없었다. 물론 사내 분위기도
예전과 다를바가 없었다. 명선은 회식이 끝나고 퇴근해서 돈유안이란 얼굴없는 남자에게 고맙다는 메일
을 보냈다. 명선 은 메일을 보내면서 이남자가 선지자가 아닐까하는 우스운 생각을 해봤다. 그의 말이
백퍼센트 맞는건 아니었지만 그의 말대로 명선이 짊어진 감사에 대한 고민이 징계를 당할 정도의 문제덩
어리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명선씨, 창고에서 전화왔어요. 자재 왔대요.”
자재업무를 혼자 총괄하듯이 겉멋만 잔뜩든 석현은 매번 자재입고 업무는 명선에게 맡겼다. 입사시기는
비슷했지만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명선이었지만 입사동
기와 입사배경이 베일에 가린 인물이라 함부로 대하기도 어려워 그 냥 넘기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박차
장이 중요업무를 그에게 맡겨버리는탓에 자연스럽게 항상 자재입고업무는 명선 의 몫이었다. 인숙도 구
매과 2년차라 나름대로 의 선임자의식이 몸에 배여있어서인지 자재입고는 의레히 명 선의 몫이 되어있었
다.
“나 좀 나갔다 올게.”
“무슨 자재가 온거지?”
“모르겠어, 나가봐야지.”
멀뚱하니 쳐다보는 인숙을 뒤로하고 명선은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많은 화물차들이 눈에 띄었다. 한눈
에 봐서는 출하차랑인지 자재입고 차량인지 알수 없었다. 단지 알고 있는거라곤 컨테이너 실은 트레일러
는 수출제품을 실을 차라는 사실이었다. 출하부직원들은 부지런히 컨테이너에 제품을 싣고 있었다. 이렇
게 눈에 보이는 현상만 생각하면 명선은 매출격감이란 말이 실감나지 않았다. 명선이 창고쪽으로 다가가
자 눈에 익은 차량한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온통 회색인것과는 달리 적재함은 하얀바탕인 대형탑차. 자
신의 승용차를 들이받은 차였다. 명선은 습관적으로 지게차 운전수한테 자재가 뭐냐고 물었다.
“보시다시피 켄입니다.”
지게차 기사는 명선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채 대답했다. 명선은 지게차기사의 말은 귀에 들 어오지 않고
거칠어지는 자신의 숨소리만 느끼고 있었다. 명선이 화물차 가까이 다가가자 화물차 운전석 문이 열리며
사람이 내렸다. 운전기사를 보는순간 명선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의 기운이 빠지는것 같았다. 그 남자가
아니었다. 키가 작달막한 남자는 연신 공장을 두리번 거렸다.
“명선아!”
본관건물쪽에서 인숙이 명선을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명선은 무슨일이냐며 물었지만 인숙은 화물차
를 이리저리 살피며 아무일이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인숙은 화물차 기사를 보는순간 허탈해 하는기색
이 역력했다.
“사람이 바뀌었네. 애, 니가 인수해.”
인숙은 쌀쌀맞게 내뱉고는 다시 본관건물쪽으로 사라졌다.
“저....앞전에 이차 운전하던 사람은 그만 뒀나요?” 명선은 한눈팔고 있는 기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그 사람요? 회사 그만뒀어요. 어디 다른회사로 옮기는 바람에 며칠전에 그만뒀어 요.”
명선은 남자의 말이 깊은 수렁같다는 느낌이 들면서 자신이 그 늪으로 빠져드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
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 남자에게 자신의 감정이 걷잡을수 없을만큼 쏠려 있었던 것이다. 기껏
얼굴한번 마주친 남자를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는 사실에 명선은 자신이 참 한심스럽다는 생
각이 들었다. 하지만 명선의 현수에 대한 생각은 잠시였다. 그가 자신의 차를 들이받았 다는 사실도 아버
지 회사에 다녔다는 사실도 흐르는 시간은 이모든것을 잊게 만들었다. 그것들은 단지 우연일 뿐이었다고
명선은 단언했다.
“명선아, 오늘 게시판 봤어?”
“게시판...이라니?”
인숙은 출근하자마자 사무실로 들어오며 기쁜표정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게시판에 니 이름과 내이름이
나붙었어.”
“그게 무슨..소리니?”
“석현씨 말이 사실이었어. 나는 영업부로 다시가고 너는 디자인과로 다시 발령났어. 그런데 그게 통합이
래....”
“그...그게 정말..이니?”
“인사이동에 관한 게시물이 나붙었어. 인사위원회이름으로...”
명선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식당으로 달려갔다. 식당앞 게시판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하반기 인사이동에 즈음하여.... 노동력의 효율적 운용을 위하여 3/4분기 인사이동을 꽤하게 되었습니
다. 아무쪼록 사원들의 협조를 당부드리며 불만이 있더라도 더 나은 세진의 미래를 위한 양보라고 생각
해 주시고 협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게시판 인사이동 첫머리에는 이렇게 간단히 적혀있었다. 원래부서로 복직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은 없었
고 한직으로 밀려나는 사원들에 대한 미안함이 강조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것은 영업3부를 폐쇠
하고 영업1부와 2부, 그리고 디자인과를 통폐합한다는것 이었다. 그 통합부서의 명칭은 토탈 마켓팅 설
계란 생소한 이름의 명칭이었다. 영업1부팀장과 2 팀장은 대기발령으로 나와있었고 명선은 박차장과 인
숙,석현과 더불어 토탈 마켓팅 설계부서로 발령나 있었다. 여러부서에서 퇴출당한 사원 몇 명은 구매과
로 발령나있었다. 명선은 기쁜 마음도 잠시 통폐합 이란 단어에 웬지모를 서글픔이 가슴 밑바닥에서 치
밀어오르는것만 같았다. 결국은 말이 통합이지 디자인과를 중요하디 중요한 마켓팅과에 예속시킨거나
마찬 가지라는 생각때문이었다. 인숙은 모든정황을 파악하고 있어서인지 하루종일 웃는얼굴이었다. 박
차장도 자신의 원래특기인 영업부로 복귀하게 되어서인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만족 해 하는 눈치였다.
명선은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잘된것 같기도 하면서 뭔가 일이 꼬이는것만 같은 느낌때문
이었다. 명선이 그렇게 어수선한 기분에 젖어 있는동안 부서 통폐합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명선아, 통폐합부서의 팀장이 며칠후에 회사로 온데.”
“그...그래.”
명선은 인숙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명선은 누가 통합부서의 장으로 오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
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수없을것만 같은 불안감이 그녀의 몸과 마음을 꽁꽁 묶어두고 있었
기 때문이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으라는 말때문인지는 몰라도 개인 사물만 달랑 챙겨 통합부서로 올라간
명선 과 인숙, 그리고 현석과 박차장은 한동안 놀란표정으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통합부서는 사람 만
바뀐게 아니라 모든 기물이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도배도 말끔하게 흰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기존
영업부 직원 몇사람이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머! 정말 깔끔하네. 이제 일할맛이 나겠네.”
“마켓팅부가 중요하긴 중요한가봐.”
“그럼 당연하죠. 매출의 모든 것이 마켓팅부에 달렸다는것은 상식아니예요?”
“통이 크긴 크네.”
“그게 무슨소리예요?”
“아니...돈꽤나 바른것 같다구요.”
명선은 인숙과 석현의 대화에 부러움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미래는 장담할수 없을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
기 그지 없었다. 단 하루만에 대충 업무파악을 끝낸 저녁무렵 돌연 재석이 통합부서로 올라왔다. 그는 감
사를 담당할때의 그 무표정한 표정 그대로 였다.
“제가 누군지 아시는 분은 아실겁니다. 저는 저에 대한 나쁜선입견을 미리 차단하고져 제 신분을 밝힙니
다. 저는 회장님의 아들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한테 군림하고져 하는건 절대 아닙니다. 저는 다만 좀더
나은 회사의 내일과 여러분의 내일을 위해 뛰고져 하는마음 뿐입 니다. 가식같다구요? 그렇게 생각하신
다면 달리 드릴 말씀이 없군요. 하지만 사심은 버리시고 저의 진정성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부서 통폐
합이라서 불만이 많으신분들도 계시겠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특기를 충분히 살려나갈수 있도록 배려할거
니까 너무 걱정들 마세요. 그럼 내일 새로 부임하는 팀장과 활기찬 세진의 미래와함께 여러분의 밝은 내
일을 여시기 바랍니다.”
재석은 사람들의 박수소리를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새로올 팀장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또한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항간에는 박차장이 팀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았지 만 그것
은 루머에 불과했다. 박차장은 영업부로 복귀한것만으로도 만족해 하는 눈치였다. 다음날 말끔한 정장차
림으로 회사에 나타난 새 팀장을 본 명선은 한동안 얼어붙어버렸다. 그는 국제금속기사, 아니 국제금속
의 마켓팅팀장이라는 김현수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의 승용차를 들이받은 그 남자였다. 첫날이라
서 아침에 누구보다도 일찍 출근해 업무준비를 하던 명선은 무심코 텅빈 팀장자리를 바 라보면서 새로
올 팀장이 누굴까 생각했었다. 명선은 현수를 보는순간 뒤통수를 둔중한 뭔가에 얻어맞은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지는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꿈을 꾸고 있는것만 같아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수를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현수는 적막한 사무실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는 명선을 한번 쳐다보고는 윗도리를 벗어 옷걸이
에 걸고는 천천히 명선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