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펠릭스 멘델스존(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 Bartholdy, 1809.2.3~ 1847.11.4)
“누나 없이 내 음악은 흐르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멘델스존에게 누나 파니는 각별한 존재였다. 작곡을 하면 누나에게 제일 먼저 들려줬고 여행을 떠나있을 땐 누나에게 모든 상황과 기분을 시시콜콜 편지로 알렸다. 이런 남매를 두고 학자들 간에 연구도 많았고 의견도 분분하였으나 무엇보다 두 사람을 하나로 묶었던 것은 음악이 아니었을까! 파니 멘델스존 또한 멘델스존 못지않게 피아니스트로서 작곡가로서 많은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활동이란 콘서트를 갖거나 작품을 발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파니에게 음악은 사교 활동의 도구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펠릭스에게는 음악이 직업이 될 수 있겠지만 너에게는 그저 장식품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너의 존재와 행위의 근본이 될 수는 없다…”
파니는 결혼 후에도 계속 작곡을 했고 그녀의 작품은 400여 편에 달한다. 그러나 그녀는 음악가로 나설 수 없었고 몇몇 작품은 멘델스존의 작품 발표회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어쩌면 파니는 자신이 전면에 나설 수 없었기에 멘델스존의 음악에 더 많은 관심과 조언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파니가 뛰어난 재능을 가진 동생 멘델스존에게 많은 아이디어를 전해준 것은 틀림없다. ‘말 없는 노래’라는 뜻의 멘델스존의 ‘무언가(Leider ohne Worte)’ 또한 파니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멘델스존의 ‘무언가’ 중 “베네치안 곤돌라의 노래”. 영화 ‘once’ 삽입곡.
완벽한 여인과 완벽한 결혼생활을 꿈꾸다.
1835. 11. 19 멘델스존이 26세 때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다. 심장마비였다. 멘델스존은 망연자실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어릴 때부터 멘델스존의 모든 교육의 세세한 부분까지 동참하고 관여해온 스승이자 멘토였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부재로 영혼의 빈곤을 느끼던 멘델스존은 다음해 5월,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된다. 와병 중인 체칠리엔페라인의 합창단 감독을 대신해 프랑크푸르트에 몇 달
머무는 동안 합창단원 가운데 세실 소피 샤를로테 장르 노라는 여성과 가까워진다. 세실은 열 여덟살이었고 늘씬 한 몸매에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 그리고 투명한 피부와 푸 른 눈에 새까만 속눈썹을 지닌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 멘델스존의 부인, 세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바탕으로 작곡한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 전 12곡 중 제9곡 “결혼행진곡”.
-예니 린트
1845년이 끝날 즈음, 라이프치히에서는 25세의 소프라노 예니 린트의 성공적인 데뷔 무대가 있었다. 그녀의 무대를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매력에 빠졌고 멘델스존도 예외가 아니었다. 멘델스존은 그녀에게 낭만적인 노래를 선물했고 그녀와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함께 하려고 애썼다.
이듬해 봄에는 함께 배를 타고 니더라인 음악축제에 참가했고 멘델스존은 그녀를 위해 오라토리오 <엘리야>를 작곡했다. 그 해 8월, 버밍엄 축제에서 <엘리야>는 2000여명의 관객의 환호를 받으며 초연에 성공했다. 그러나 멘델스존이 린트를 염두에 두고 썼던 소프라노 부분은 결국 그녀의 목소리로 들을 수 없었다. 린트는 영국데뷔를 위해서는 오페라가 낫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린트와 멘델스존의 관계는 뜨거운 연인 관계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단순히 음악적 동지만도 아니었다. 멘델스존의 아내 세실도 이들의 관계를 알아차리고 불편해했고 린트는 후에 ‘멘델스존이 자신의 영혼을 충족시켜준 유일한 존재’였다고 고백했다.
린트를 알게 된 지 2년 후 멘델스존은 짧은 생애를 마감했고 그다음 해 린트는 영국에서 쇼팽과 만나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2년 후 쇼팽은 죽음을 맞이하고 이후 린트는 더이상 오페라를 하지 않는다.
-파니의 죽음 그리고 멘델스존의 최후
1847년. 멘델스존의 누이 파니가 죽었다. 41세의 나이로. 그러나 멘델스존에게 그 소식이 전해진 것은 6일이나 지난 후였다. 누이의 결혼식 때에도 마차가 뒤집히는 바람에 참석할 수 없었던 멘델스존은 누이의 장례식과 추도식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다. 이미 끝나버렸다. 멘델스존은 크게 소리지르다 실신했다. 4개월 뒤 멘델스존은 베를린을 방문하고 파니가 쓰던 방을 찾았다. 그리고 <독일의 옛날 봄노래>를 썼다. 이 노래는 멘델스존의 최후의 작품이 되었다.
“나는 홀로 고통스러워하네.
이 고통은 끝나지 않으리라.
나는 너로부터, 너는 나로부터,
아아 사랑하는 이여, 헤어져야 했으니.”
그리고 한 달 뒤, 1847년 11월 4일. 멘델스존은 여러 차례의 발작 증세 끝에 결국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누이가 세상을 뜬 지 6개월 만이었다. 멘델스존은 가족 묘지의 누이 옆자리에 묻혔다. 그리고 6년 뒤 홀로 남은 세실도 36세의 젊은 나이로 그들을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