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월에 피는꽃---프롤로그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느려 터졌지?”
명선은 뻐근거리듯 쑤셔오는것 같은 목을 만지며 엘리베이터안에서 숫자를 초조하게 쳐다
보았다. 10층이 마치 100층은 되는것 같은 짜증스러움이 밀려왔다. 벌써부터 박차장의 벌
레씹은듯한 표정이 어른거렸다. 어제 감사소식부터 오늘 아침 사고까지....일이 꼬일려니 되
는 일이 하나도 없는것 같았다.
일거리를 집에 갖고 가본적 없던 명선은 어제 퇴근해서 밤늦게 까지 컴퓨터앞에 앉아있다가
새벽녘에 잠들었었다. 갑작스런 내부감사 소식때문이었다. 아직 소진하지 못한 원자재가 창
고에 떡하니 여보란듯이 적잖게 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창고에 쌓여있는 자재 재고는
족히 5개월을 쓰고도 남을 정도다. 윗선까지 보고되면 징계는 피할 수가 없다.
살인적인 원자재난 때문에 충분한 원자재 확보를 위해 여러군데의 거래처를 확보해놓았던게
화근이었다. 하지만 최악의 불황으로 매출이 급감하면서 가랑비에 옷젖듯이 서서히 재고가
눈덩이처럼 쌓여가고 있었다. 박차장은 자신이 알아서 할테니 걱정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했
지만 막상 감사날짜가 다가오자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용빼는 재주가 없는 이상 감
사를 피할수는 없을것 같았다. 어제 하루종일 뒷짐지고 벌개진 얼굴로 제자리걸음을 하던 박차
장은 퇴근무렵 직원들을 모아놓고 장부를 적당히 고치라며 은밀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한마
디로 조작하라는 것이었다. 조작이라고 해봤자 장부상 재고를 누락시키는것이다. 하지만
감사팀이 바보가 아닌이상 장부만 확인할 리가 없었다. 명선은 박차장의 어설픔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어쩌면 감사를 무사히 넘길수도 있을것만 같은 막연한 생각이 들기도 하여 퇴근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컴퓨터앞에 앉았지만 곧 갈등에 젖어들었다. 아무리 상사의 명령이
지만 입사한지 1년밖에 되지않은 신출내기가 부정한 짓을 하기에는 담력이 턱없이 달렸다.
더군다나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장부조작같은 그릇된 짓은 도저히 할수 없었다. 자재가 넘
쳐나는건 분명 치밀하지 못한 업무처리 탓이지만 그것이 장부를 조작할 정도로 크나큰 과오
는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리고 사실상 따지고 보면 구매과의 잘못만은 아
니다. 생산현장에서 올라오는 구매내역서를 토대로 구매를 하기 때문에 구매과가 희생양
이 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명선은 십년묵은 체증이 내려가는것만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아무리 서슬퍼런 감사팀이라지만 사실이 그러할진데 어찌할것인
가. 명선은 길길이 뛸 박차장이 걱정되었지만 바보같이 감사팀에 일방적으로 몰매를 맞지는
않을것이라는 막연한 각오를 다졌다. 명선은 그렇게 입술을 깨물며 굳게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눈만 말똥말똥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음한구석이 불안한것은 사실
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침대에서 뒹굴던 명선은 다시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바탕화면에서
메신저를 클릭했다. ,이시간에도 있을까?. 명선은 그런 생각을 하며 ,돈 유안,이란 아이디를 클
릭하고는 평소에 하던대로 ,하이,를 입력하고 보내기를 눌렀다. 하지만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도 저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명선은 혹시나 싶어 쪽지함을 클릭했다. 예상대
로 돈 유안의 쪽지가 저장되어있었다.
“정야님, 오늘은 좀 바쁘군요. 그래서 퇴근도 못하게 되었어요. 오늘밤은 일찍 주무세요.
좋은꿈 꾸시구요.^^”
좋은꿈 꾸라구....참으로 그다운 시니컬한 말이다.....명선은 다시 컴을 끄고 침대에 벌렁 몸
을 던졌다.
깜박 잠들었는가 싶었는데 눈을 떠보니 어느새 날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늦었다 싶어 일어
나자마자 부스스한 얼굴로 거울을 쳐다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과 헝컬
어진 머리, 그녀는 아무리 바빠도 세수만하고 출근할 수가 없어서 머리감고 뜨거운물에 샤
워까지 하고는 급하게 아파트를 나와 승용차를 끌고 길거리로 나왔다. 모닝커피로 아침을
때우는 일이 다반사였으나 오늘은 커피마실 시간도 없었다. 뜨거운 물로 피로를 푼탓인지
기분은 한결 좋아진것 같았으나 북새통인 도로를 보니 다시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서울여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15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세진그룹에 들어왔지만 1년째
성남 공장 구매과에 썩고 있는 자신이 어떤때는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면서 팔자 타령을
하곤 했다. 친구들은 대기업에 입사한 명선을 부러워했으나 명선은 빚좋은 개살구에 다름아
니라며 경외심어린 표정들 짓지 말라며 면박을 주곤했다. 그녀가 원래 배치받았던 부서는
구매과가 아니고 제품디자인과였으나 입사후 배치받자 마자 얼마되지 않아 대대적인 구조
조정한파에 휘말려 한직인 구매과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의 설움이란 말로 표현할수 없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입사해 좀처럼 얼굴한번 제대로
보기 힘들다는 회장과 면담까지한 명선을 사원들은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곤 했었다. 하지만
환란에 버금가는 불황앞에 초연할 기업은 없었다.
명선은 큰길로 나오다가 뭔가 허전한 느낌에 룸미러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맨얼굴이
었다. 화장을 진하게 하는편은 아니었지만 기초화장은 버릇처럼 항상 하고 다녔다. 명선은
분주한 도로 가운데를 피해 버스정류장기둥을 조금 뒤로하고 차를 세웠다. 그리고 빠른 손
놀림으로 핸드백을 열었다. 에센스, 화이트닝에센스, 수분크림 썬크림, 명선은 닥치는 대로
손에 집었다. 그리고 핸드백을 조수석으로 던질때였다. “쿵!” 하는 둔중한 소리와 동시에 명
선의 몸이 출렁거렸다. 그녀는 정신이 혼미해지는것같은 충격을 느끼며 핸들에 머리를 박
았다. 명선은 한동안 그렇게 멍한 상태로 꼼짝않고 있다가 머리를 들고는 주위를 둘러보았
다. 보도블럭위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명선은 누군가 자신의 차 뒤꽁무니
를 들이받았음을 그때서야 어렴풋이 감지를 했다. 명선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채 문을 열려
고 손잡이를 잡자 누군가가 문을 잡아당기듯이 열었다. 하마터면 문에 의지했던 몸이 밖으
로 쓰러질뻔했다.
“괘...괜찮아요?”
생면부지의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서 있었다. 명선은 뻐근한 목 뒷덜미를 만지며 후방을
쳐다보았다. 세상에 저것이 뭐람.......집채만한 트럭한대가 자신의 차 꽁무니에 자석처럼 붙
어있었다. 명선은 사내를 한번 쳐다보고는 차 꽁무니로 다가갔다. 플라스틱 범프가 무슨
힘이 있다고 저렇게 들이 받는담.....범프는 무지막지한 트럭의 쇳덩어리범프에 받혀 움푹 패
여 있었다. 명선은 하도 기가막혀 입술을 깨물며 허리에 두팔을 얹었다. 트럭 운전수인듯한
사내는 쭈뼛거리며 연신 괜찮냐며 물어왔다. 명선은 남자를 한번 흘겨보고는 초조한 기색으
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얼굴이 벌개진 박차장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접촉사고를 낸적
도 있고 몇 번 당한적도 있었지만, 그래서 사후처리를 어떻게 해야할건지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한가지 분
명히 알고 있는 사실은 뒤에서 받으면 무조건 뒤차가 잘못이라는것은 알고 있었다. 남자는
그렇게 난감한 표정으로 서있는 명선을 더 두고 볼수 없었던지 병원가자며 말을 건넸다. 하
지만 명선은 괜찮다고 말하고는 어떻게 처리할거냐며 사내를 다그쳤다. 남자도 당황하는 기
색이 역력했다.
“일단 병원부터 갑시다. 좀 다치신것 같은데...”
“지금 그럴시간 없어요.”
“정말... 괜찮아요?”
명선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지갑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티셔츠 주머니에 꽂혀
있는 볼펜으로 뭔가를 적었다.
“저도 사실 무척 바쁘거든요. 이건 제 명함입니다. 뒤에는 제 차번호를 적었어요. 이따 한가
할 때 연락주세요. 보험처리를 하던 자비로 해결하던 처리를 해드릴께요. 다행히 차 운행하
는데는 지장이 없을것 같군요. 오전중에 연락주시면 줗겠네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마치 뭔가에 쫓기듯 높디높은 운전석에 올라 차를 조금 후진하는가
싶더니 아스팔트바닥을 흔들어대는듯한 트럭의 엔진소음을 뿜어대며 명선의 곁을 지나 도
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명선은 꿈을 꾸는듯 눈앞에서 사라지는 트럭을 멍한 눈길로 쳐다
보았다. 명선은 혹시 저 남자가 그냥 도망쳐 버리면 어떡하나 싶어 걱정도 들었지만 명함을
받아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것만 같아 마음을 놓았다. 여차하면 경찰서에 신고하면 되
는 일이었다. 명선은 다시 찌그러진 차꽁무니를 살펴보고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세진에
입사할 때 아버지가 선물로 사주신 새차였다. 아까는 느끼지 못했는데 정신을 수습하고 나
니 피해자로서 가해자인사내한테 언성한번 제대로 높이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
했다. 이따 다시 만나면 원없이 냉소적으로 단단히 쏘아붙여주고 싶었다.
명선은 생각난듯 아까 사내가 건네준 명함을 꺼내보았다.
(주) 국제금속 마켓팅전략부 김 현수
주소; 대전 광역시 대덕구 신탄진동.......
명선은 주소를 읽다말고 명함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는가 싶더니 누군가
가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명선은 구석으로 몸을 비키며 엘리베이터 숫자를 쳐다보았다. 5층
이었다.
“하명선씨 맞죠?”
명선은 고개를 돌려 말을 건네오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말끔한 감색정장차림의 남자, 낯이
익긴 익은것 같은데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입사한지 1년이 되었지만 직원들이 워낙 많아서
누가 누군지 일일이 기억하고 다닌다는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구매과와 떼어놓을수 없는 관
계에 있는 생산현장책임자 몇 명정도와 입사동기, 그리고 같은 구매1과에 근무하는 남자직
원한명과 여직원한명이 그녀가 안면트고 알고 지내는 사람의 전부였다 그러면서도 명선은
예의 차원에서 기억을 되살리는 시늉이라도 해야할것만 같아서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남자는 명선의 얼굴에 나타난 마음을 읽었는지 약간은 어색한듯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애써 기억할려구 하지 말아요. 1년이란 시간이 많은 직원들을 기억할 정도로 긴 시간은 아
니니까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을 천장으로 옮겼다. 명선은 자신이 입사한지 1년이 되었다는
것을 남자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소름이 돗듯이 온몸이 오싹해지는 기분이들었다.
여태껏 이 남자가 자신을 눈여겨 보고 있었던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마치 감시당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불쾌한 느낌 마저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
을 알고 있을 정도면 입사를 언제 했는지 알고 있는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명선은 남자가 누른 엘리베이트 층수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12층이었다.
12층이면 사장실과 부사장실,그리고 총무부가 있는 곳이다. 남자는 그런 명선의 마음을 다
시 꽤뚫고 있다는듯이 한마디 내뱉었다.
“입사 면접볼때 기억안나요?”
“녜?”
남자의 말에 명선은 1년전을 떠올렸다. 서울본사 본회의실에서 면접시험을 보았었다. 면접
시간은 짧았지만 그 기억은 오랫동안 명선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면접예상질문에 대
해서 면접가이드북을 끼고 살다시피한는등 그렇게 눈과귀를 다 열어놓고 정보를 수집,섭렵
했으나 실전은 딴판이었다. 학교생활에 관한 질문이나 일상생활에 관한 질문에는 본능적으
로 조리있게 대답을 한것 같았으나 심층면접으로 접어들때는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생활영어 면접, 비즈니스 영어면접끝날 때 까지만 해도 불안했지만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허를 찌르는 황당하다시피한 질문에는 입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것만
같았다.
명선은 그제서야 남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바로 그 면접관이었다. 살아오면서 가
장 힘들었던 때를 꼽으라면 명선은 두말없이 입사면접시험을 꼽을것이다. 그때 어처구니없
는 질문으로 자신을 너무나 힘들게 한 그 남자였다.
“아...안녕하세요?”
명선은 남자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남자는 “이제 기억나요?”하면서 피식 웃었다. 어떻
게 들으면 조롱하는것 같은 웃음이었으나 남자의 미소에는 겪의없는 온화함이 묻어나고 있
었다. 면접당시의 고압적인 태도와는 딴판이었다.
“힘들죠?”
“녜?”
남자의 말에 명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신입이라서 그렇게 묻는다면 자연스러웠으
나 남자의 다음말은 명선을 귀를 의심케했다.
“구매과라는데가 원래 좀 힘든 곳입니다. 힘든 만큼 구매과란 부서가 중요한 곳입니다. 기
업예산의 절반 이상이 구매과 몫이거든요.”
남자가 말을 마치자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10층이네요. 어서 내리세요.”
“그...그럼 먼저 내릴께요.”
명선이 내리며 뒤돌아 보자 남자는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명선은 긴 복도를 도는 동안 남
자의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구매과에 근무한다는건 또 어떻게 알고 있을까 하는 생
각이 들었다. 자신은 수많은 직원들속의 한명일뿐인데 남자가 자신을 철저하게 기억하고 있
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명선이 구매과문을 열자 침묵으로 인한 적막감이 사무실을 억
누르고 있었다. 박차장은 회전의자에 깊숙이 몸을 가라앉힌채, 시름에 잠긴듯 창문밖에다
시선을 두고 있었다. 영업2팀에 있다가 명선처럼 좌천당한 1년 선배인 인숙이가 왜 늦었냐
며 자리에 앉는 명선에게 눈꼬리를 치켜떴다. 명선은 가벼운 접촉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차가 밀려 늦었다는 핑계와 맞먹는 거짓말이라는 말을 직시한 신문
글을 본 것이 생각나는 바람에 입을 닫고 말았다.
“애, 너 어떻게 됐니?”
“무슨 소리니?”
인숙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으나 명선은 상투적으로 대답했다.
“어제 박차장이 처리하라는거 말이야.”
“장부 말하는 거니?”
“애가 왜 이렇게 능청을 떨어, 뭐 좋은 일이라구.... 솔직히 난 도저히 못하겠더라.”
풀이 죽은 인숙의 말에 명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인숙은 “어머, 너도 별수 없구나.“라고 말
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러면서 그런짓을 했다가 어쩌면 영원히 쫓겨날지도 모른다며
입술을 실룩거렸고 그럴바에는 있는그대로 보여주고 가벼운 징계를 받는게 낫다고 덧붙였
다. 명선은 인숙의 말이 백번 옳다고 생각되었지만 불안감은 떨칠수 없었다. 음류켄같은것
은 재고가 많아도 상할일이 없지만 커피원료나 레몬같은것은 냉동보관해도 한계가 있었다.
명선은 여전히 창쪽으로 미동도 않고 돌아앉아있는 박차장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사에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한다며 오부장으로부터 늘상 매를 버는것이 다반사였다.
그런 그였기에 그의 고민은 클수밖에 없었다. 오부장은 때를 잘만나서인지 아니면 운이 좋
아서인지 한달째 해외에 채류중이다. 인숙은 박차장이 출근해서도 생각과는 달리 아무말없
이 돌상처럼 앉아있다고 명선에게 귀뜸했다. 명선은 박차장도 암행어사의 출두에 아무런 대
비도 소용없음을 깨달은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손을 놓고 있을수는 없었
다. 명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차장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돌아앉는 박차장의 표정은 의외
로 담담했다.
“죄송해요 차장님. 차마 그런일은 못하겠어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나도 그냥 홧김에 얘기한거니까. 인숙씨나 명선씨가 무슨 잘못이
있어요. 책임은 다 간부들 몫이죠. 사실 장부만 조작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죠.”
명선은 박차장의 체념어린듯한 말에 마음이 무거워지는것 같았다. 박차장은 이번감사팀에
회장아들도 포함되어있다고 말하면서 생산팀에 얘기해서 사람들을 빼내줄테니 재료창고와
자재창고나 말끔히 정리하고 청소하라고 말했다. 박차장은 감사팀에게 그래도 밉보이기 싫
은지, 그래서 최악의 상황을 피해보려고 안간힘을 써보려는 의지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녜? 켄이 왔다구요?”
명선이 자기자리로 돌아오자 인숙은 놀란 표정으로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한동안 통
화를 하고 전화를 끊은 인숙은 사색이 되어 명선을 쳐다보았다. 명선이 무슨 일이냐고 묻기
도 전에 인숙은 깡통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깡통은 음료켄을 말한다. 하필이면 감사기간에
원자재가 들어오다니......감사기간에는 현장의 상황과는 관계없이 자재반입은 올스톱인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자재가 들어오다니.....명선은 아직 그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으나 1년선배
인 인숙의 표정을 보자 예삿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인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차장과 뭔가
를 얘기한는가 싶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의 표정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원가도 싸고 식품처럼 변질될 일이 없어서 깡통같은건 괜찮데.....”
“......”
아직 신입인 명선은 선배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안괜찮아도 들어온 자재를 돌려보낼수는 없잖아. 그래도 감사팀이 보면 좋지 않으니 빨리
하차시키고 돌려보내래. 어저 나가자. 그나마 다행인것은 구매과 감사는 내일이라는 점이야.
물론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만큼 감사에 대비한 준비 시간을 조금
이라도 더 갖는게 낫지 않겠니?”
명선은 인숙을 따라 건물 밖으로 나왔다. 눈이 시려울 정도로 푸르런 가을 하늘을 올려다본
명선은 한순간 손으로 눈을 가렸다. 오늘따라 하늘이 유난히 푸르른것 같았다. 그렇게 청명
한 가을기운에 억눌려 조용하기만 한 넓디넓은 마당 한켠에 대형화물차 한 대가 떡하니 자
리하고 있었다. 평소같았으면 음료자재를 싣고온 차들로 북적거렸겠지만 어제 다들 통보를
받아서인지 음료내용물 자재를 실었을 만한 화물차는 한 대도 없었다. 명선은 화물차 가까
이 다가갔을때만해도, 그리고 운전기사가 내릴때까지만해도 그 차가 아침에 자신의 승용차
를 들이받은 화물차인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남자는 명선을 보자 반가운듯 환한웃음을
지었으나 명선은 황당하기도 하여 멍한 시선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명선의 표정이
별로 달갑잖아 하는것 같은 느낌에 이내 웃음을 거두고는 아무말없이 인숙에게 시선을 돌렸
다. 명선은 그제서야 아침에 엘리베이터안에서 꺼내본, 남자가 준 명함이 생각났다.
,국제금속, 어디서 많이 보고 들어봤던 상호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켄을 납품받고 있던
거래처 회사상호였던 것이다.
“여기 첨 오시는분 같은데 운전하던 기사분은 그만 두셨나요?”
인숙은 국제금속에 대해서 마치 다 알고 있다는듯이 남자에게 웃으며 아는체를 했다. 명선
은 국제금속이란 상호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지만 납품기사가 누구인지는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었다.
남자는 인숙의 말에 말없이 가볍게 웃기만 했다. 남자에게서 납품송장을 받아쥐는 인숙의 호주
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차장님, 무슨 일이세요? 녜, 알았어요.”
인숙은 전화를 끊는가 싶더니 명선에게 눈길을 돌렸다.
“명선아, 나 사무실에 좀 갖다올게. 니가 인수좀 해.”
납품송장을 명선에게 쥐어주다시피한 인숙은 총총걸음으로 본관건물쪽으로 걸어갔다. 명선은
인숙이 사라지자 갑자기 공원에서 엄마손을 놓친 사람처럼 외롭고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
것은 자신앞에 서있는 남자때문임은 부인할수 없었다. 남자는 으리으리한 공장전경에 압도
된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명선은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린듯 머뭇거리다가 간
신히 입을 열었다.
“절 따라 오세요.”
명선은 말을 해 놓고는 후회를 했다. 마음과는 달리 냉랭하기 그지 없는 말투였기 때문이었
다. 아침에 사고를 당했을때만해도 만나면 단단히 쏘아주고 싶었지만 이내 그런마음은 사라
지고 없었지만 자신이 내뱉는 말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켄 적재창고로 남자를 데려간 명
선은 창고앞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턱수염이 길게자란 지게차 운전수한테 납품송장을 건네
며 켄을 내리라고 말했다. 다른날 같았으면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면 어떡하냐구 한마디
했었지만 오늘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게차 기사는 명선의 말에 아니꼽다는듯이 담배를
발로 비벼끄며 창고옆에 서있는 지게차위로 올라갔다. 명선은 지게차기사의 오만함에 어느
정도 이력이 나있어서인지 무덤덤했다. 명선이 지게차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뒤돌아서자
남자는 화물차 윙바디(적재물을 안전하게 운반하기위해서 만든, 적재함 양쪽에 날개같이 폈다
접었다 할수 있는 문이 달린 탑차)양쪽문을 열고 있었 다. 명선은 한눈에 봐도 어렵게 열고 있다
는것을 그의 설익은 듯한 동작에서 느낄수 있었다.
지게차가 분주히 움직일동안 말없이 지켜보던 사내는 하차가 끝나자 화물차 문을 닫고는 조심스
럽게 명선에게 다가왔다.
“저...지금 같이 나가는게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