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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에 피는꽃---(1)

Hopefortomorrow 2007. 2. 21. 16:49

13월에 피는꽃--1

 

 

 

 

 

남자의 말에 명선은 대답은 않고 인수증에다 사인을 하고는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는 명 선에게 마치

 

무시를 당하고 있는듯한 생각이 들었으나 명선앞에서 자신의 입지는 좁아만 보 였다.

 

“물건 수량은 맞겠죠?” 명선은 지게차가 물건을 내릴때 확인을 했으나 노파심에서 다시 남자에게 물었

 

다. 남자는 대답대신 명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명선은 남자가 불쾌해 하고 있다는것을 그의 표 정

 

에서 읽을수 있었다. 명선은 마음속생각과는 달리 자꾸만 엇박자를 내딨는 자신의 남자에 대한 냉랭한

 

태도에 자꾸만 자괴감이 밀려왔다. 명선은 그것이 출근길의 사고때문일거라고 애서 자위를 해보지만 꼭

 

그때문만도 아닌것 같아 혼란스럽기만 했다. 많은 납품기사들을 대했지만 오늘같이 지극히 사무적으로

 

대해보긴 첨인것 같았다. 먼길 오느라 수고했다며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주는걸 한번도 거른적이 없었

 

던 자신이었으나 오늘은 그런생각조차 까맣게 잊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밖에서 기다릴...까요?”

 

남자는 재차 명선에게 물었다. 명선은 박차장한테 얘기하고 나와야 될것만 같았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실...래요. 사무실에 좀 갖다올께요.”

 

남자를 다시 쳐다본 명선은 처음봤을때와는 달리 남자의 눈매가 매우 선해 보이는것 같았다. 명선 은 다

 

시한번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는 올때는 커피라도 한잔 뽑아와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건물쪽으로 걸어

 

갔다. 현수는 본관건물쪽으로 사라지는 명선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명선에게 받아쥔 납품인수증을 펼쳤

 

다. 또박또박 가지런히 쓴 하명선이란 이름이 그의 눈에 들어왔 다. 현수는 한동안 주위를 둘러보다가 하

 

품을 하며 기지개를 길게 켰다. 밤새 운전을 한탓인지 피로 가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었다. 오늘 아침사고

 

도 깜박 졸았던 탓이었다. 현수는 건물쪽을 다시한번 쳐다보고는 운전석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나올동안

 

눈이라도 좀 붙여야 할것만 같았다. 깜박 잠이 든것 같았으나 운전석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현수는 게슴

 

츠레한 눈으로 창문을 내다보고는 밖으로 나왔다. 명선이란 여인외에 한명의 남자와 아까 명선이란 여인

 

과 같이 나왔던 여직원이 나와있었다. 현수와 눈이 마주친 박차장은 놀란얼굴로 입을 쩍하니 벌렸다.

 

“야! 김현수!”

 

“형, 잘있었어?”

 

“니가 여기 웬일이야?”

 

박차장은 활짝 웃으며 현수를 덥썩 안았다. 명선과 인숙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두사 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식이 연락이나 하고 올라오지. 설마 나 안보고 그냥 내려갈려구 한건 아니지?”

 

현수는 박차장의 말에 멋쩍은듯 입가에 실날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근데 기사는 어쩌구 팀장인 니가 직접 올라왔어? 그것도 마켓팅 팀장이....”

 

“응, 기사님이 지병이 있으셔서 병원에 입원하셨어. 그래서 할수없이 직접올라왔어. 이차 운 전할수 있는

 

사람이 회사에 나밖에 없잖아.”

 

“그랬었구나....난 명선씨가 출근길에 접촉사고를 당했다고 나가봐야고 한다기에 어떤놈이 명선씨를 놀

 

라게 했는지 얼굴이라도 볼려구 나왔는데 뜻밖에 너라니 세상참 좁기는 좁은가 보구 나.”

 

명선은 두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커피를 든 왼손이 저려왔다. 커피가 든 종이컵을 건네 기에는 두사

 

람의 대화에 낄 틈이 없었다. 눈치빠른 인숙은 커피잔을 들고 어정쩡하게 서있 는 명선에게서 컵을 빼앗

 

다시피 받아쥐고는 현수에게 내밀었다.

 

“이거 한잔 드실래요? 커피가 다 식었네요.”

 

“예, 고마워요.”

 

인숙에게서 커피를 받아쥐는 현수를 명선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박차장은 현수를 명선과 인숙에게 대

 

학후배라며 간단히 소개시켰다. 박차장은 현수에게 화물차는 여기에 놔두고 명선과 같이 나갔다 오라고

 

하고는 감사준비 때문에 바쁘다며 인숙과 본관 건물쪽으로 사라졌다. 명선과 현수는 박차장과 인숙이 사

 

라진쪽을 한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두사람의 어색한 만남은 그들의 시선을 할리없게 만들어 놓고 있었

 

다. 납덩이처 럼 무거운 공기를 깬것은 현수였다.

 

“차가 어디...있어요?”

 

“저..저쪽 정문 경비실 뒤쪽 주차장에 있어요.”

 

“망가진차 타고 오는동안 챙피해서 혼났죠?”

 

명선은 현수의 세심한것 같은 성격에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리는것만 같았다. 현수는 올때 봐둔 공업사가

 

있다며 명선과 공업사로 향했다.

 

언제 연락했는지 공업사에는 보험회사 직원 이 나와있었다. 차는 범프와 트렁크가 많이 망가져서 판금을

 

해야한다고 했다. 견적은 대 략 150만원 가량이 나왔다. 차 파손으로 인한 운행차질로 생기는 금전적 손

 

해까지 포함하 면 170만원이 넘었다. 불황이라서 그런지 공업사에 수리맡겨진 차들이 별로 없었다. 접수

 

를 끝내자 곧바로 명선의 차 는 수리에 들어갔다. 한동안 수리하는걸 지켜보던 두사람은 공업사 밖으로

 

나와서 택시를 잡아타고 회사로 돌아왔다. 현수는 박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려간다고 말하자 섭섭하다

 

며 기다렸다가 점심이나 먹고 가라 고 했지만 현수는 바쁘다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진심으로 사과드릴께요. 그리고 교통사고란것은 모르니까 내일 자고 나면 몸이 아플지 모 릅니다. 그리

 

고.....”

 

후유증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현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추근대 는 인상을 줄것

 

같은 느낌때문이었다. 명선도 말끝을 흐리는 현수의 마음을 알것만 같았다. 현수는 차에 오르며 명선에

 

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명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무말없 이 허리를 가볍게 숙이며 대답을 대신

 

했다. 현수는 시동을 걸자마자 명선을 한번 쳐다보고 는 회사를 빠져나갔다. 명선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인숙과 아침에는 안보이던 석현이란 남자 직원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감사에 대비한 준비라곤 청소와 서류정리밖에 없다는것이 한심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 고 또 한편

 

으로는 편하기도 하지 않니? 대체 이런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거니?”

 

“.......”

 

인숙은 명선에게 투털거리며 푸념을 해댔다. 명선은 감사에 대한 선입견을 떨쳐버리려 애썼 다. 그러면

 

서 명선은 어릴때 선생님이 내 주신 수학숙제를 밤새풀던 기억이 떠올랐다. 감사 란 어쩌면 선생님이 내

 

준 풀기 어려운 수학문제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점은 수학문제는 노력하면 정답이

 

이 있지만 이번같은 경우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매듭같아 매를 맞을 수밖에 없을것 같다는 것이다. 이런생

 

각이 들자 명선은 어제밤에 다졌던 오기같 은것이 스르르 꼬리를 내리는것 같았다. 창고에 쌓인 많은 재

 

고는 변명의 여지가 없음을 그 대로 보여주고 있고 경력1년짜리가 서슬퍼런 감사팀앞에서 무슨변명을 할

 

수 있을거란 말인 가. 감사팀이 왜 이렇게 재고가 많으냐고 물으면 뭐라고 변명한단 말인가. 어제밤에는

 

구매 과 잘못만은 아니라며 버틸각오를 다졌지만 그것은 책임전가를 하는짓에 불과할것이라는 생 각이

 

들었다. 물론 책임의 대부분은 박차장에게 돌아갈것이지만 구매과 직원인 이상 책임을 면키는 어렵다.

 

전공과는 무관하게 입사하자마자 엉뚱한 부서로 떨어졌을때는 막막함에 남 몰래 눈물까지 흘렸고 퇴사

 

도 심각히 고려했었다. 하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입사한 자신을 이렇게 마냥 내버려두지는 않을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하루하루를 버텨 오고 있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제는 감사로 인해 능력을 의심받

 

게 될 지경에 놓인것만같았다. 그렇게 되면 마냥 하루하루를 버티더라도 원래 부서로의 복귀는 고사하고

 

승진조차 생각할수 없을 것이다.

 

“참! 명선아, 아까 그남자 말이야.”

 

인숙이 눈을 반짝이며 갑자기 생각난듯 명선을 쳐다보았다.

 

“그 남자...라니?”

 

“애가 또 왜이렇게 능청을 떠는지 몰라. 왜 아까 그 남자 있잖아. 박차장 대학 후배라는, 국 제금속기사,

 

아니, 국제금속 마켓팅팀장이란 남자 말이야.”

 

“그런데?”

 

“그남자 참 괜찮게 생기지 않았던?”

 

“글...쎄?”

 

“하긴 눈이 머리꼭대기에 붙은 너한테는 그런남자가 성에 안차겠지.”

 

“.......”

 

“그 남자 연세대 경영학과를 수석졸업했대, 대단하지 않니?”

 

“그...그래?”

 

“근데 연세대경영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어떻게 그런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는지 몰라. 박 차장 말 들어

 

보니 굉장히 똑똑한 남자인것 같던데....”

 

인숙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요즘 아무리 능력있어도 길거리로 내몰리는게 대학졸업자들이야. 대학이 실업자 양산소가 된지 언젠

 

대.....”

 

“하긴....박차장도 이런부서에서 섞고 있는것 보면 놀랄일도 아니지...”

 

명선은 현수란 남자를 화제에 올린 인숙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졌다. 공허한 눈 길로 넋이 나

 

간듯 멍한 표정으로 서류를 정리하던 인숙은 다시 명선에게 눈길을 돌렸다.

 

“너 설마 그남자와 전화번호같은거 주고받은거 아니지?”

 

“그게 무슨... 소리니? 내가 그렇게 해픈 여자로 보여?”

 

“아...아냐...그냥 해본 소리야.”

 

인숙은 미심쩍다는듯 명선에게 눈을 흘기다가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어제꼈다.

 

“그리고 그런 남자는 나한테 성이 안찬다며?”

 

“그건 그냥 해본 소리고 오히려 그남자가 니한테 과분할것 같더라.”

 

“너 말다 했니? 그러는 너는 아까 내가 들고 있던 커피를 빼앗아 왜 그남자한테 삽살개처럼 건넸어?”

 

명선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인숙의 팔을 마구 꼬집었다. 인숙은 불에 덴듯 얼굴을 찡그리 며 꼬집힌 팔

 

을 입으로 훅훅 불어댔다.

 

“아휴...아퍼....기집애도 툭하면 꼬집기는......”

 

“안꼬집힐려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어머!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거 보니 너 그남자 한테 관심이 있었구나.”

 

”애도참, 관심은 무슨 관심.....“

 

대꾸는 그렇게 했지만 인숙의 관심이란 말에 명선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면서 화끈 거렸다. 자

 

신의 차로 그남자와 공업사로 갈때도 그리고 택시타고 회사로 돌아 올때도 별다 른 느낌이 없었다. 단지

 

좀 불편했을 뿐이었다. 얼굴이 붉어지는건 그 남자와 연관시켜보려 는 인숙의 의심 때문일것이라고 명선

 

은 생각했다.

 

“애, 카센터 가고 오는동안 그남자와 무슨 대화 나눴니?”

 

그냥 넘어갈 리가 없는 인숙이었다. 인숙은 의심의 눈초리로 명선을 바라보았지만 명선은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그남자는 20분정도 되는 거리를 가 는동안 몸 괜찮으냐고 한

 

번 물은것이 전부였고 그후에는 명선에게 눈길한번 주지 않았고 차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도착해서

 

는 ,여깁니다, 라는 말이 전부였다. 차를 맡기고 택시타 고 올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입에 자물쇠를 채

 

운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명선은 그 런 남자의 침묵에 압도되어 자신도 차창밖으로 고개를 돌린채

 

두손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남자 직장에서 쫒겨나도 굻어죽을 일은 없겠더라.”

 

인숙의 말에 명선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하냐며 쳐다보았다.

 

“그건또 무슨... 소리니?”

 

“운전해서 먹고 살면 되잖아. 대체 그런차 운전할려면 어떤 면허증이 필요한거야. 바퀴가 셀수없을 정도

 

로 많던데 명문대 졸업한 엘리터가 그렇게 큰차는 또 어떻게 운전하는지 몰 라.”

 

“명문대 졸업하면 대수니, 힘든 현실에 적응할려면 뭐던지 할줄 알아야지.”

 

“하긴...그렇긴 하다만....”

 

인숙은 건성건성 서류 정리를 계속하다가 케비넷을 정리하려는듯 케비넷문을 열고 있는 명 선에게 다가

 

갔다. 명선은 또 무슨 일이냐는듯이 뚱한 얼굴로 인숙을 돌아보았다.

 

“명선아, 너 아침에 얘기 들었지? 이번 감사팀에 지체높으신 회장아들도 포함되어 있다는거 말이야.”

 

“그런데?”

 

“그 회장아들이 오늘 아침에 공장에 왔대. 오늘 총무과감사와 회계 감사가 있잖아. 아마 그 것 때문에 온

 

것 같아. 근데 그 회장아들이 인사위원회위원장이래. 그래서 이번감사를 진두 지휘한데.”

 

“그...그래.”

 

인숙의 말에 명선은 아침에 승강기안에서 본 남자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 남자가 회장아들 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감사는 혼자 하는게 아니기 때문에 감사팀에 포함 된 간부일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간부로 보기에는 너무나 젊어보였다.

 

“근데 이런 대기업의 회장아들은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2년동안 회장얼굴도 한번 본적 없 는데.....사람

 

은 사람이겠지? 그러고 보면 회장과 면담까지한 니가 새삼스럽게 우르러 보인다.”

 

인숙이 회장아들을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외계인쯤으로 생각하고 있는것만 같아 명선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자! 이제 대충 끝내고 창고로 가요.”

 

석현이란 동료가 다가오며 소리를 질렀다. 정석현이란 직원은 구매1과의 유일한 말단 남자 직원이다. 명

 

선이 구매과로 밀려난후 얼마되지 않아 소리없이 입사해서 소리없이 구매과로 들어왔다. 회사 채용규정

 

에 공채나 특채가 아니면 입사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조항이 있 기에 그의 입사를 두고 말들이 많았

 

었다.

 

 

 

 

 

“성남공장 인원재배치에 대한 자료는 작성했습니까?”

 

재석은 회계감사를 지켜보다가 사장실로 올라왔다. 사장은 아들뻘되는 재석이 나타나자 기 다렸다는듯

 

이 결제철을 재석에게 내밀었다. 재석은 한동안 서류를 뒤적거렸다.

 

“요즘 우리회사 제품디자인에 대한 전문가의 평가가 아주 안좋게 나왔는데 내부 혁신을 좀 해야되지 않

 

겠어요?”

 

“어떤 점을 얘기하는거야?”

 

사장은 못마땅한 눈으로 재석을 쳐다보았다. 아무 때나 불쑥나타나서 불편한 관계를 확인 이라도 하듯이

 

쪼아되는듯한 재석을 사장은 영 탐탁잖게 생각하고 있었다.

 

 “작년 업무평가때 가장 안좋은 점수를 받은곳이 제품 디자인과입니다. 그런데 아까 가보니 그때 그인원

 

들이 그대로 있더군요. 물갈이를 좀 해야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작년에 장기근속 직원들 내보내고 어렵게 뽑은 신입들도 타부서로 보냈잖아.”

 

“그때는 별수 없었잖아요. 능력에 관계없이 고액연봉자들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잖아요. 또 한 그정도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열심히 노력할수있는 충분한 동기부여를 제공한것 아닙 니까? ”

 

“........”

 

“물론 사람을 바꾸는게 능사는 아니지만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1년동안 별다른 성과가 없다

 

는건 불황을 핑계로 무사안일에 빠져 직무를 유기하는거나 마찬가지입니다.”

 

“.......”

 

“몇년동안 디자인기획에서 설계까지 외주준것이 몇건이나 되는지 아시잖아요. 이렇게 실적 이 없으면 디

 

자인과를 폐쇠하고 디자인 전문컨설팅회사에 맡기는수밖에 없습니다.”

 

“........”

 

사장은 재석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디자인과를 폐쇠한다는건 곧 사장인 자신 의 무능을 만

 

천하에 드러내는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장은 재석의 말에 속으로 코웃음 을 쳤다. 재석의 말은 그

 

만큼 외주제작비로 나가는 예산이 많으니까 원가절감차원에서라도 실속있게 디자인과를 꾸려가자는 말

 

의 다름아니라는 생각때문이었다. 없앨래야 없앨수가 없 는 것이다.

 

“작년 감원때 다른부서로 이동한 디자인과 직원들 다 그대로 있어요?”

 

“.......”

 

사장은 이제와서 그럴거면 뭣하러 어렵게 뽑은 신입사원들까지 타부서로 내몰았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그말은 입속에서 맴돌뿐이었다. 재석은 사장의 의중을 눈치챘고 있었다.

 

“작년감원은 저의 뜻과는 관련이 없다는거 아시잖아요. 어때요, 그직원들 아직 근무해요?” 사실이었다.

 

항상 디자인과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재석의 아버지인 회장이 전결로 처 리한 일이었다. 회장은

 

디자인과를 아예없앨려고 했으나 재석의 만류로 감원선에서 끝냈던 것이다.

 

“글세.....내가 알기로는 현장으로 발령받았던 두명은 그만뒀고 나머지 두명은 아직 근무하고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

 

“그 두사람에 관한 신상명세서와 입사시험 성적표를 이번 감사가 끝나는대로 서울본사로 좀 보내주세

 

요.”

 

“알았어....”

 

“그리고 불황탓도 있지만 요즘 매출격감이 아주 심각합니다. 시장이 포화상태라면 신규사업 에다 투자를

 

하고 싶지만 불황탓으로 돌리기에는 타사와 비교해서 매출이 너무 부진해요. 뭔가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어요?”

 

사장은 재석의 말이 무슨뜻인지 몰라 눈말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재석은 그런 사장의 표정 을 살피며 가

 

방에서 책자를 하나 꺼내 사장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야?”

 

“최근 뜨고 있는 업체를 총 망라한겁니다. 사장님인맥을 총동원해서라도 스카웃할 인재를 좀 찾아보세

 

요.”

 

“전방위 로비라도 하라는 거야?”

 

“동종업계는 건드리지 말아요. 기업윤리상 할짓이 못돼죠.”

 

사장은 니가 언제 기업윤리를 따졌냐며 속으로 비아냥거리며 마지못해 책자를 펴는 시늉 을 했다. 고용

 

사장으로서의 비애가 온몸을 휘감는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런일은 인사위 원회에서 맡아서 할 일이지 사장인 자신한테 이런일을 맡기는데에 대해서 심기가 불편

 

하기 이를데 없었다.

 

 

 

 

 

“참! 내정신좀봐. 차는 정비공장에 있지.”

 

인숙과 헤어진 명선은 습관적으로 차를 찾으려구 주차장을 뒤지다가 한심한듯 혀를 빼물었 다. 명선은

 

공장을 빠져나와 택시를 탈까 버스를 탈까 망설이며 고민에 빠져드는 자신이 또 한심스러워 쓴 웃음이

 

나왔다. 초가을의 공기는 상큼했고 드문드문 깃털같은 구름이 떠다니 는 서쪽하늘은 붉은 노을로 물들어

 

투명 물감으로 채색해놓은듯 깨끗하고 아름다워보여서 복잡한 생각은 뙈아리를 틀수 없을정도로 온몸이

 

상쾌해지는것만 같았다. 명선은 택시를 탔다. 그렇다고 딱히 정해놓은 목적지도 없었다. 다만 아파트로

 

갈까 부모님이 계신 서울로 갈까를 걱정했다. 오늘따라 웬지 휑한 아파트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엄

 

마와 아빠는 청 승맞다며 서울에서 출퇴근하라고 하셨지만 나름대로의 자유가 보장된 한정된 자신만의

 

공간 을 포기하기 싫어 매번 거절을 했고 그 생각은 아직도 유효했다. 대학새내기인 남동생 성현 은 명선

 

이 집을 나오던날 만세를 불렀다. 그러면서 라면으로 끼니때우며 고생좀 해보라며 놀려됐었다.

 

“어, 누나 웬일이야?”

 

현관에 들어서자 평일에 웬일이냐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성현을 명선은 귀엽다며 볼을 꼬집 었다. 성현

 

은 마치 옛날로 돌아간듯 명선의 손을 뿌리치며 화를 벌컥 냈다.

 

“아빠는 들어오셨어?”

 

“이젠 집이 그리운 모양이지? 큰방에 들어가봐. 아빠 들어오셨어. 씨...툭하면 볼을 꼬집고 난리야. 내가

 

한두살 먹은 애도아니고...”

 

아주 못마땅한듯 혼자 군시렁 거리던 성현은 2층 자기방으로 올라갔다. 현관에 놓인 부친의 신발이 명선

 

의 눈에 들어왔다. 명선의 모친도 거실로 나오며 평일에 나타난 명선에게 무슨 일 있냐며 걱정스런 얼굴

 

로 쳐다보았다. 50줄에 접어드는 모친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안쓰러워보여 명선은 모친을 꼭 안았

 

다.

 

“애가 왜이래 징그럽게.” “엄마, 나오늘 자고 갈까?”

 

“출근은 어떡하구?” “그리 멀지 않은데 뭐.”

 

“이것아 그러지 말고 집에 들어오라니까.”

 

“엄마, 나 구속은 싫다고 했잖아. 출퇴근 하기에는 좀 먼거리고....”

 

“구속은 니가 니 자신에게 하고 있잖아. 집놔두고 뭐하러 나가서 고생을 사서해. 부모가 딸 걱정하는게

 

구속이라고 생각하는 니가 이상하다. 어서 들어가자 저녁 먹게. 아빠도 한시간 전에 들어오셨어. 옛날에

 

는 나를 먼저 찾더니 취직하고 부터는 아빠를 먼저찾는다. 너 그 거 아니?”

 

“엄마도 참,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달라진게 없는데....”

 

명선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모친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감출수 없었다. 자식이 아빠보다 엄 마를 먼저 찾

 

는건 모정이 부정보다 강한 탓일것이다. 하지만 머리가 크고 사회에 진출할 시 기가 되면 가정이란 한정

 

된 울타리안에서 사회에 진출하는 자식에게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 할수없는 어머니보다는 사회적영향력

 

이 큰 아버지에게 기대게 마련이다. 명선의 모친도 이 를 모르지는 않는다. 명선이 서울여대에 들어갔을

 

때나 남편의 말을 듣지않고 남편 직장의 경쟁업체에 덜컥 입사했을때 까지만 해도 당당한 딸이었으나 입

 

사하자마자 어려운 처지에 놓이자 죄책감과 불안 때문에 항상 남편을 먼저찾는 명선이었다. 명선의 아버

 

지는 딸이 자 신이 다니는 명성그룹에 입사하기를 간절히 바랬으나 명선은 아버지란 혈연을 배경으로 입

 

사했다며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까봐 애초부터 아버지의 바램을 무시했었다. 그렇다고 명선은 모

 

친이 생각하는 만큼 후회의 감정은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은 기대를 저버 린 딸로서의 미안한 감

 

정 그 이상은 없었다. 보란듯이 당당히 자신의 힘으로 난관을 헤쳐나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고 지금도 그생각은 여전했다.

 

“아빠, 저 왔어요.”

 

“그래, 명선이 왔어?”

 

명선이 방문을 열자 부친은 컴퓨터옆에 서류뭉치를 쌓아둔체 일에 몰입해 있었다. 명선은 대기업의 전무

 

이면서도 잠시라도 손을 놓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명선은 가

 

끔 안타까움을 느끼곤 한다. 언제 명퇴를 당할지 모르는 불안감같은것이 아버지의 얼굴에 서려있는것 같

 

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던 것이다. 겉으로 는 가장으로서의 위엄을 흩트리지 않으려고 애쓰는것 같았

 

지만 이렇게 등을 보이고 일에 몰두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명선은 한집안의 가장으로서 피곤해 절은 처

 

연한 모습을 느 끼곤한다.

 

 “아빠, 오늘도 많이 바쁘신가 봐요.”

 

 “아니다. 바쁘긴.... 3/4분기 결산좀 하느라고..... 말끝을 흐리는 부친에게서 명선은 하루가 다르게 깊게

 

주름이 패여가는 부친의 이마가 눈 에 들어온건 최근이라고 생각해보지만 그것은 자신에 대한 변명일뿐

 

이었고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 후부터라는것을 명선은 부인할수 없었다. 처름 세진에 입사했을때는 냉랭

 

한 눈빛을 하고는 명선을 나무랬으나 명선이 구매과로 발령나고 난뒤부터는 오히려 말수가 줄어들었 다.

 

딸에 대한 실망감이 속에서 가슴앓이로 커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명선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부친은

 

공기가 탁한지 실크커튼이 쳐진 창문을 활짝 열고 는 심호흡을 한번 크게했다. 명선은 아버지의 행동에

 

는 일련의 버릇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가슴에 담아둔 얘기를 한다든지 중요한 말을 꺼내기전에는 항상

 

심호흡을 하는 버릇이 있었 던 것이다.

 

“너, 우리회사에 들어오지 않으련? 지금이라도 늦지않았어. 아빠가 말한마디 하면 바로 들 어올수 있다.”

 

“녜?”

 

명선은 부친의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항상정도를 걷고 편법을 쓰지않는 아버지의 입 에서 그런말

 

이 나오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딸에 대한 걱정이 지나쳐 자신이 쌓아 온 청렴한 이미지에 타격

 

을 주려는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명선은 당혹해했다. 그 런 명선의 속내를 알아차렸는지 부친

 

은 진지한 표정으로 너 정도면 특채란 명분으로 충분히 입사할수 있다며 명선을 설득했다. 그런 부친의

 

표정에는 딸에 대한 걱정과 완고함이 교차 하고 있었다. 명선은 자신이 아버지가 저런 말씀을 하실 정도

 

로 힘들게 했나 싶어 심한 자 책감이 밀려왔지만 지금 이상태에서 그만둔다는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

 

지 않았다. 어 떡하든 세진에서 오뚝이처럼 일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부도덕한 사람으로 만들

 

고 싶지 않았다.

 

“아빠, 못들은 걸로 할께요. 그리고 너무 걱정마세요. 언제까지 아빠를 실망시키지는 않을거 예요.”

 

“실망의 끝에까지 왔는데 더 실망하고 말게 뭐 있어.”

 

“미안해요 아빠.”

 

“니가 굳이 싫다면 할수 없지만 너는 기다려보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 만 시간은 너

 

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명선의 부친은 딸이 대학에서 산업디자인과를 선택했을때부터 못마땅해했었다.

 

자신은 딸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라거나 큰인물이 되라는 등 부담되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고 자신

 

의 일이 있는 평범한 커리우먼으로 사회활동을 하다가 착한 남자 만나서 결혼잘하는것 외에 는 딸에게

 

바라는것이 없었다. 하지만 명선의 생각은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랐다. 전문직종 으로 사회적성공을 일구

 

겠다며 다부진 꿈을 가지고 있었다. 자식이기는 부모없다고 자식의 인생에 깊숙히 관여하는것도 부모로

 

서의 도리가 아니다싶어 딸의 선택에 백기를 들고 말았 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딸이 사회진출초기부터

 

시련에 봉착하고 말았으니 부모로서의 안타 까움은 말로 표현할수 없을정도로 가슴아픈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