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우소--3

어제 뿌린 씨앗들

Hopefortomorrow 2015. 4. 22. 11:48

돌런갱어 시리즈 4권

 

-어제 뿌린 씨앗들-

 

저녁 황혼이 장밋빛으로 타오르고 있는 가운데 나는 머리 위 커다란 아치 아래 어둑한 곳에서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숨기고, 조리가 멜로디와 거대한 무도회장에서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연인과 춤을 추는 그녀는 공주처럼 보였다. 아, 조리와 멜로디 사이의 정열이 내 가랑이도 아쉬운 갈망으로 휘저었다. 다시 그들처럼 젊어지고.....모든 걸 다시 새로 하고.... 두 번째는 제대로 하고 싶다는 갈망....

 

문득 다른 벽감 쪽에 바트가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마치 염탐하려고 기다린 다는 듯이....그는 문틀에 편하게 기대어 서있었다. 하지만 멜로디를 쫒고 있는 불타는 눈을 편하지 않았다. 그 눈은 내가 전에 본 적이 있는 욕망으로 들끓고 있었다. 심장이 펄쩍 뛰었다.

바트가 조리에게 속한 것을 원하지 않았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본 문 중에서-

 

 

나는 쉰두 살, 크리스는 쉰네 살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흘러 우리 어머니가 했던 약속이 마침내 실현됐다. 내 나이 열두 살, 크리스가 열네 살 때 한 약속이.(당시 다락방에 갇힐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엄마가 유산을 상속하고 폭스워스 홀이 우리것이 된다고 말한 것)

어머니가 죽고 유언이 공개되고 나서야 비로소 폭스워스 홀은 우리의 수중에 떨어졌다. 어머니는 가장 아끼던 손자인 바트, 그녀의 두 번째 남편과 나 사이에서 태어난 그

 

에게 집을 남겼지만, 바트가 스물다섯 살이 될 때까지 크리스의 신탁 관리 아래 놓이게 되어 있었다.

폭스워스 홀은 그녀가 우리를 찾아 캘리포니아 주로 이사 오기 전부터 재건축이 시작되었지만, 신폭스워스 홀의 완공은 그녀가 죽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집은 15년간 관리인들이 돌보고 변호인단의 법적인 관리를 받으며 텅 빈채로 서 있었다. 바트가 살기로 마음먹을 때까지 어쩌면 비탄에 빠져 기다린 저택이었다. 우리는 바트가 언젠가는

 

이곳에 올 것이라고 늘 짐작해왔다. 이제 그는 자기가 와서 자리를 차지 할 때까지 우리가 집을 잠시 맡아달라고 했다. 엄밀히 말하면 이집은 바트의 것이었다.

나는 마천루같은 거대한 폭스워스 홀을 바라보며 또 다른 공포가 우리를 덮칠 거라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나를 끊임없이 다독였다. 나를 따라 다니는 죽음의 공포가 언제든 고개를 쳐들수 있다는 생각을 밀어내지 못하고 내 심장은 폭스워스 홀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랬다. 난 어려서 부터 죽음과 관련된 꿈을 많이 꿨다. 그 꿈

 

은 아버지의 죽음을 시작으로 현실로 나타났다. 난 폭스워스 홀과 함께 죽음을 몰고 다니는 여자였다. 그것도 예기치 않은 죽음을....나는 저주받은 마녀일지도 몰랐다.  12살때 아버지가 죽었고 폭스워스 홀에서 쌍둥이 동생 코리가 죽었다. 그후 결혼하고 남편인 줄리언이 죽었다. 그리고 다시 쌍둥이 여동생 캐리가 죽고 바트 윈슬로와 할머니, 헤니가 죽고 폴이 죽었고 내 어머니도 죽었다. 헤니와 폴만 빼고는 모두가 비극적으로 내가 보는 앞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 어릴적 할머니의 말대로 우린 정말

 

저주받은 악마의 자식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수시로 나를 괴롭혔다. 할머니는 저승에서 나를 보며 비웃을 지도 모른다. 내 말이 어디 하나 틀린 말이 있더냐 캐시? 어디 부정이라도 해 보거라! 할머니가 내 귀에 그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잘못 꽤어진 첫 단추, 그건 엄마와 아버지도 아니었고 크리스와 내가 아니었다. 그건 진정한 악마 맬컴이 시작한 것이었다. 폭스워스 홀의 증조부 맬컴이 아버지

 

의 어린 연인을 탐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난 그렇게 폭스워스 홀을 바라보며 나를 합리화하려 애썼다. 그럼에도 이젠 어떠한 형태의 악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끝내 떨쳐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몸을 떨어야만 했다. 내 표정만으로 생각을 읽는 크리스는 내 안의 두려움을 잠재우려 나를 포옹했다.

그도 메머드같은 몸집을 자랑하는 폭스워스 홀을 보면서 자연적으로 옛날로 돌아갔을 것이다. 모든게 바뀌었다지만 형태는 그대로인 신 폭스워스 홀, 북쪽 동 끝 방에서

 

그 옛날 네명의 드레스덴 인형들이 다락방을 오르내리며 절망의 나날들을 보냈던 4년 가까운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을 것이다. 크리스와 난, 그 지옥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시는, 꿈에서 조차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거대한 감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엄마가 나어린 바트의 재산 관리인으로 크리스를 유언장에 넣지 않았더라면 우린 이곳에 올일이 없었고 크리스와 나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부부처럼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 엄마는 모든 걸 예상하지 않았을까? 터무니 없는 억측이지

 

만, 크리스와 나의 죽음은 엄마가 작성한 시나리오였을 지도 모른다. 바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고 친자식처럼 대하려 했던 크리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와 내가 근친이라는 걸 그는 항상 머리속에 깊이 각인시키고 크리스를 대했다. 크리스의 부정은 그에게 신념으로 자리잡았다. 물론 나한테도 별반 다를바 없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장남 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 뒤를 이어 발레를 했고 촉망받는 당쇄르로 발레계로 부터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어릴적 부터 사귀었던 멜로디와 21살에 결혼까지 했다. 바트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완전히 딴 사람으로 탈바꿈했다. 적어도 비쥬얼적인 측면에서, 훌쩍하니 키가 커고 공부를 퍽이나 잘하는 청년으로 자라났고 하버드 법대를 수석 졸업하고 졸업 식장에서 가족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졸업생 대표로 축사까지 할 정도로 어릴적의 바트는 떠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하지만 막내 신디(입양한 딸)는 끝내 바트의 졸업식장에 오지 않았다. 그녀는 전화로 대뜸 싫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바트가 자신이 어릴적에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고스란히 기억하는 신디에게 있어서 오빠 바트는 서로 다른 핏줄만큼이나 증오의 대상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둘은 아직도 만나기만 하면 서로 못잡아 먹어 으르렁 거렸다. 바트는 나이와 몸집외에는 전혀 자리지 않았다. 마치 정신연령이 어릴적으로 박제가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연단앞에 선 바트는 우리 모두가 집에서 알던 바트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그는 이제 위험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정상이다, 라고 그의 주치의들이 말했었다.

그러나 내가 본 바로는 의사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바트가 극적으로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자잘한 징후가 많이 있었다. 바트의 졸업축사에 우리가족 모두는 눈물을 흘렀다. 바트의 졸업 축사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크리스도 누가 짐작이나 했겠냐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텅빈 폭스워스 홀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웬 노인하나가 우리를 맞았다. 바트가 깜짝 놀랄 일이라고 한 것이 이 노인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은 우리가 폭스워스 홀에 갇혀 있을때 엄마가 큰 오빠가 죽은 이후 실종되었다던  둘째 오빠 조엘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우리에게는 외삼촌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마치 그의 일대기를 듣는 것만 같앗다. 그는 형이 죽고 아버지 맬컴과의 갈등이 심해 집을 완전히 떠났고 실종으로 처리되었다. 할아버지의 엄마 코린에 대한 편애

 

는 오빠둘을 등한시 하다 못해 외면 했다고 한 엄마의 증언과 일치했다. 그래서 오빠 둘은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등을 돌린 상태였다. 할머니가 엄마인 코린을 그렇게 싫어한 것도 남편이 자식둘을 외면하고 딸인 코린만 챙겼기때문이었고 이복삼촌과의 근친상간 결혼은 엄마에 대한 할머니의 증오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그는 홀로 유럽을 방랑하다가 어느 겨울날 산중에서 쓰러졌고 종교인들에게 발견되어 수도원에서 수도승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돌아왔고 바트가 불러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그는 정확히 바트의 집사인 것이었다. 오래전 폭스워스 홀의 집사 존 에이머스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가 왜 돌아왔는지는 말하지 않았고 사심없이 바트를 돕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어쨋든 그도 폭스워스 홀의 구성원이었고 폭스워스홀의 지분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물론 현실적으론 불가능 하지

 

만, 그는 바트가 우리 가족의 지난날을 모두 털어 놓았다고 한다. 다락방에서 3년 넘게 갇혀 있다가 탈출한 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크리스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크리스가 내 남편이 아님을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바트가 그에게 나와 크리스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을 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조엘에게서 옛날 폭스워스 홀의 집사 존 에이머스를 떠올리게 되는 건 도플갱어로 겹쳐 보일 정도였고 그와 함께할 폭스워스 홀에서의 생활은 벌써부터 불안과 음습함으

 

로 내 가슴을 짓눌렀다. 하지만 우린 여기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바트가 올해 25살 생일을 보내고 유산을 온전히 다 물려받을 권리를 얻게 되면 우린 떠난다. 바트의 25살 생일과 함께 크리스의 재산 신탁관리가 끝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크리스의 생각이다. 나는 아직 그 일에 관해서는 결정지은게 없었다.

바트가 왔다. 신 폭스워스 홀의 진정한 주인임을 알리듯 정열적인 붉은색의 세단을 폭스워스 홀 마당에 스키드 자국이 날정도로 핸들을 꺾으며 차를 세웠다. 그는 내 앞에

 

있던 크리스는 외면 하고 나를 포옹했다. 바트는 폭스워스 홀에 오자마자 다가오는 제 생일파티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조리도 오고 그의 부인 멜로디도 오고 신디도 온다. 우린 실로 수십년 만에 다시 같은 지붕아래 살게 된다는 사실에 나는 기뻤다. 하지만 오랜만에 마주하는 형제들의 관계가 옛날처럼 순탄치 않을 것 같은 예감은 항상 나를 불안하게 했다. 특히나 변하지 않은 바트는 우리가족에게는 언제나 발밑의 지뢰였고 그럼에도 바트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어쨌든 내 친자식이

 

었다. 바트는 신 폭스워스 홀에 오자마자 바로 나에게, 나의 우려를 증명하듯이 일갈했다. 자신의 25번째 생일파티를 대학동창들과 마을 사람들, 그리고 많은 지인들을 불러 호화롭게 벌일것이라는 말에 내가 가족끼라 오붓하게 치르는게 어떠냐고 했는데 돌아온 대답이, 왜요? 어머니의 죄가 드러날까봐서요? 였다. 물론 바트의 이런말은 이제 이골이 나서 나는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기 일 수 였다. 크리스와 내가 남매로서의 자리로 되돌아가길 바라는 그에게 있어서 나와 크리스의 부부같은 관계는 일종의 주홍

 

글씨였고 낙인이었다. 대화중에 서로 말이 길어지고 언성이 높아지면 가족사 얘기가 나올때도 있었고 그럴때면 그는 그 낙인효과를 십분 써먹었다. 오빠와 같이 사는 엄마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요? 이말 한마디면 나는 찍소리도 못냈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크리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가 크리스에게는 그런 말 조차 하기 싫어할 정도로 크리스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이런 바트에게서 득도를 한 사람이 있다면 크리스 일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런 바트를 이해하려했고 이해하려고 지금도 애쓰고 있

 

었다. 장남조리와 임신한 며느리 멜로디가 왔다. 바트와 조리는 서로 힘주어 안으며 오랜만의 형제상봉을 기뻐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숭배받는 형수인 발레리나 멜로디를 바라보는 시선이 영 언짢았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멜로디의 육감적인 몸매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트가 형과 형수를 조엘에게 소개를 하자 조엘은 댄서라고 들었네라는 말로 그들의 예술을 격하시켰다. 조리는 조엘이 사라지자 저 이상한 노인이 누구냐고 물었고 나

 

는 어깨를 으쓱하며 바트에게 설명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