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우소--3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5

Hopefortomorrow 2015. 4. 10. 11:42

돌런갱어 시리즈--2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5

 

폭스워스 홀은 막다른 길 끝에 있었고 장관을 이룬 근사하고 커다란 집들 사이에서도 가장 컸다. 비탈에 홀로 버티고 서서 다른 집들을 굽어보는 그 모습은 마치 높이 솟은 한 채의 성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그 저택을 며칠 동안 바라보며 계획을 세웠다. 바트와 나는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만나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울타리 쳐진 마당으로 통하는 뒷문을 통해 우리 집에 올 때는 아무도 우리를 볼 수 없었다. 울타리 뒤로는 관목이 우거지고 나무들이 많아서 프라이버시를

 

보장해주는 시골길이 놓여 있었다. 때로는 멀리 떨어진 도시의 어느 모텔에 들어가 격정적이고 달콤하며 부드럽고도 에로틱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흡족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가 점심식사 자리에서 그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캐시, 그녀가 오늘 아침에 전화를 했어, 크리스마스 전에 돌아온데. 자..잘됐군요. 나는 말하고서 곧장 다시 셀러드를 먹으며 비프 웰링턴이 오래지 않아 나오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가 얼굴을 찌푸리며 샐러드를 듬뿍 얹은 포크를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너와 내가 서로 자주 못 만나게 된다는 뜻이야. 안타깝지 않아? 내가 말했다. 방법을 찾아내면 돼요. 그가 화를 냈다. 네가 이렇게 빌어먹게 생겨먹은 여자만 아니었다면! 그게 무슨 말이예요? 아무것도 아닌 일(내 입장에선 당연했다)에 왜 그렇게 안달복달해요? 모든 여자는 남자들에게 괴물이에요. 어쩌면 우리 자신한테도요. 여자는 여자 자신의 가장 나쁜 적이죠. 이혼해서 그녀의 재산을 물려받을 기회를 포기할 필요 없어요. 뭐 그녀가 당신보다 오래 살고 또 다른 어린 남편을 돈으로 사지 말란 법

 

은 없지만요. 나는 그의 비위를 건드리는 걸 즐겼고 이 순간 그는 뚜껑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머리에서 화산이 터질듯이, 가끔보면 넌 그녀만큼이나 고약하다니까! 그녀는 돈으로 산게 아니야! 난 그녀를 사랑했어! 그녀도 날 사랑했어! 내가 지금 너에게 미쳐 있는 것 만큼 그녀에게도 미쳤었다고. 하지만 그녀는 변했어.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내가 여자와 아내에게 원하는 모든 것이었어. 다정하고 매력 넘치고, 그런데 그녀는 변했어. 그가 셀러드를 찍은 포크를 입속에 찔러 넣고 우걱우걱 씹어댔다. 그녀는 항상

 

알 수 없는 여자였어. 너처럼! 바트, 오래지 않아 모든 신비의 벽이 허물어 질 거예요. 그는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그녀의 그 아버지란 사람, 그 양반도 수수께끼였지. 언뜻 보면 사람 좋은 노신사 같지만, 그 아래는 강철로 만들어진 심장이 있었어. 내가 그의 유일한 변호사인 줄 았았는데 변호사가 여섯 명이 더 있었지. 각각 다른 임무를 맡은 변호사들이었어. 내 역할은 그의 유서 작성을 진행하는 일이었어. 그 염병할 유언장을 열두 번도 더 바꿨지. 이 가족은 넣었다가, 어떤

 

가족은 뺐다가, 또 유언장 보충서를 썼다가, 아주 미친 사람 같았어. 세상 떠나는 바로 그 순간까지 하고 싶은 대로 할 만큼 제정신이 박혀 있었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중에서도 유언장 보충서가 최악이었어. 흥!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당연히 최악이겠지, 절대로 아이를 가지면 안 되게 되어 있었으니까.(캐시남매들이 폭스워스 홀에 갇혀 살때 엄마 코린이 얘들한테 한 얘기임) 내가 물었다. 그땐 진짜 변호사 일을 하셨나 봐요? 그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당연히 그랬지. 그리고 이제 다시 변호사가 됐

 

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할 필요가 있게 됐지. 유럽을 하도 다니다 보니 권태가 밀려와. 허구한 날 똑같은 얼굴들을 보고, 허구한 날 똑같은 짓을 하고, 똑같은 농담에 웃고. 아름다운 사람들, 그들의 그 웃음이라니! 건강 빼놓고는 모든 걸 사들여도 남아도는 돈에, 돈으로 사들일 꿈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거야. 야심도 포부도 없고. 그러니 결국엔 지루함밖에 뭐가 더 남겠어? 내가 말했다. 왜요. 그렇담 이혼하고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면 되잖아요? 그녀는 날 사랑해. 그가 말했다. 너무도 짧게. 너무도

 

감미롭게.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기에 이혼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와서는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데 그녀만 당신을 사랑한다는 듯이 말하네요. 어느쪽이죠? 그가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말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캐시, 이도 저도 아니고, 분한 마음이 들어. 난 그녀를 사랑하고, 그러면서 증오해. 한때 그녀를 지금의 너처럼 생각했어. 그러니까 제발,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그 고약한 구석은 좀 눌러두고, 그녀가 했던

 

짓은 내게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넌 나는 모르는 일을 알고 있고, 그 이유로 우리 사이에 벽을 세우고 있어. 나는 사랑에 쉽게 빠지는 사람이 아니고,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불현듯 어린애가 된 것처럼 보였다. 마치 애완견이 자신을 배신했고, 생에 다시는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듯 애석해하는 어린아이. 나는 마음이 누그러져서 말을 하고 말았다. 바트, 나의 모든 비밀과 그녀의 모든 비밀을 당신이 알게 될 날이 올 거예요. 하지만 그날이 올때까지는 설령 마음에

 

없더라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왜냐하면 당신이 내게 조금이나마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과 함께 있는게 괴로울 테니까요. 그가 대꾸했다. 조금이나마? 내 평생 너를 사랑해온 것 같다고 말했잖아. 처음 네게 키스를 했을 때도 처음 같지 않고 전에 이미 한 듯한 느낌이었어. 왜 그럴까?(캐시가 폭스워스홀에 있을때 몰래 엄마방에 숨어 들었다가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는 바트를 보았고 너무나 잘 생긴 외모에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술에 입술을 갖다 댄적이 있었다) 

 

코린이 돌아오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발레 수업을 쉬고 조리는 신나서 다니는 학교에 가 있던 어느 날, 나는 아무도 모르는 길을 요리조리 지나쳐서 폭스워스 홀로 접근했다. 저 옛날에 크리스가 주조했던 나무 열쇠를 써서 뒷문을 따고 들어갔다. 쉬는 날을 맞이하여 모든 하인이 시내에 나가 있었다. 바트가 자기 일상을 아주 상세하게 얘기해준 덕분에 할머니의 일상도 아주 많이 알게 되었다. 이 오후 시간이면 간호사도 낮잠을 자고, 할머니도 휴식을 취하고 있을 터였다. 그녀는 서재 뒤의 그 작

 

은 방, 우리 네 남매가 외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기를 기다리며 그의 죽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날을 고대하던 때 그가 마지막 남은 나날을 보냈던 그 방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모든 호화롭고 웅장한 방들을 지나며 그 모든 근사한 가구와 장식들을 주린 마음으로 보았고, 무도회장으로 써도 될 만큼 넓은 현관 로비에서 양옆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는 계단을 보았다. 구불구불 곡선이 진 계단은 2층의 발코니로 이어졌고, 그곳 층계참을 지나서부터 또 계단이 이어졌다. 다락방까지 곧바로 이어지는 계단이었

 

다. 아래서 벌어지던 크리스마스 파티를 크리스와 내가 그 안에 숨어서 구경하던 커다란 괘가 보였다. 너무도 오래전 일이었는데도 나의 시계는 재빨리 뒤로 돌아갔다.

나는 당시 열두 살이고 겁에 질려 있었으며, 몸을 움직이고 소곤거리는 것 이상 큰 소리를 내면 이 거대한 집이 나를 집어삼킬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바닥에서부터 12미터는 되는 높이에 달린 세 개의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를 보고 또다시 경외감이 들었다. 그리고 모자이크 타일이 깔린 댄스 플로어에 들어서자 어떤 기분일까 싶어서 참

 

지 못하고 잠깐, 저절로 춤을 추었다. 나는 서두르지 않았고, 걸려 있는 그림들과 대리석 흉상들과 커다란 램프들과 벽에 걸린 근사한 장식품들을 감상하면서 느긋하게 걸었다. 오로지 작은 것에 너무도 인색하게 굴 수 있는 대단한 부자들만이 사들일 물건들이었다. 고작 몇 푼을 아끼자고 잿빛 태피터 한 필을 사는 내 외할머니를 상상해보라. 집 안을 꾸미는 데는 최고를 사고, 게다가 수백, 수천만 달러를 가진 사람을 말이다! 서재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알아두었던 곳이며, 비참한 상황에서 배

 

운 것은 결코 잊히지 않는 법이다. 아, 굉장한 서재였다! 클레어몬트 도서관에도 그만큼 책이 많지는 않았다. 할아버지가 썼던 육중한 책상 위에 바트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가 이곳을 서재로 쓰면서 장모 곁을 지킨다는 티가 이곳저곳에서 났다. 집에서 신고 다니는 슬리퍼가 안락해 보이는 의자 발치에 놓여 있었다. 의자는 폭이 6미터는 되는 벽난로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 유리창이 달린 여닫이 문 너머로 정원으로 향하는 돌계단 옆에 놓인 분수가 새 물통으로 세차게 물을 뿜어 떨어뜨리고 있었다. 병약자

 

가 바람을 피해 몸을 보호하며 앉아 있기에는 훌륭한, 근사하고 볕이 잘 드는 곳이었다.

이만하면 몇 년 동안 떠나지 않던 호기심은 마침내 충족이 되었고, 나는 서재 가장 끝에 달린 육중한 문을 찾았다. 저 닫힌 문 안에 마녀 할머니가 있다. 그녀의 모습이 마음속을 스쳤다. 우리가 처음 왔던 날 밤에 우리 위에 탑처럼 서 있던 그녀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두터운 몸은 힘세고 강인했고, 우리 모두를 훑어보는 잔인하고 냉정한 눈

 

에는 모든 것을 잃고 아버지도 없는 아이들을 향한 어떠한 연민도 동정도 보이지 않았었다. 우리를 보고 환영한다는 미소를 짓거나, 몹시도 사랑스러웠던 다섯 살짜리 쌍둥이의 둥글고 예쁜 뺨을 만져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밤이 떠올랐다. 외할머니가 피가 맺힌 붉은 채찍 자국을 우리에게 보여주라며 어머니에게 블라우스를 벗으라고 명령했던 일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전에는 캐리의 머리채를 잡아서 들어 올리는 무시무시한 광경도 봤다. 코리가 하얀 신발을 신은 발로 그녀의 다리를 차고, 작

 

고 날카로운 입으로 물어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입히려고 몸을 내던져야 했다. 그녀는 엄청난 힘이 실린 따귀 한 대로 코리를 데굴데굴 날려버렸다. 사랑하는 제 쌍둥이를 지키려고 했다는 이유가 전부였다. 캐리는 쉴 새 없이 소리를 질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방 안의 거울 앞에 선 내 모습도 다시 보였다. 그녀가 내린 형벌은 그야말로 엄혹하고 무자비했다. 내가 가장 아끼던 것, 내 머리카락을 망가뜨리려고 했던 것이다. 크리스가 하루 종일 내 머리카락에서 타르를 떼어내며 머리를 깎아야 할

 

사태가 생기지 않게 안간힘을 썼다. 그러고는 2주 내내 음식과 우유를 먹지 못했다. 그렇다. 그녀는 나를 다시 만나야 마땅하다. 그녀가 내게 채찍질을 했던 날, 훗날 그녀가 무기력한 쪽이 되고 내가 채찍을 내리며 그녀의 입에서 음식을 빼앗아 갈 날이 오면 만나게 되리라고 맹세했던 그대로였다.

아, 달콤한 아이러니였다. 제 남편의 죽음에 고소해할 사람이었는대, 이제는 자신이 그의 침대에 누워 더 무기력한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홀로 있다니! 나는 두터

 

운 겨울 코트를 벗고, 앉아서 부츠를 벗겨내고서 하얀 새틴 토슈즈를 신었다. 레오타드는 하얀색이었고, 내 분홍색 피부가 파도처럼 출렁였다. 이제 그녀는 타르도 끝내 망치지 못한 머리카락을 보고  시샘하는 마음이 들리라.  준비해요, 할머니! 여기 내가 왔어요!

나는 아주 조용하게 그녀의 방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녀는 아주 높은 병원용 침상에 누워 있고,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볕이 그녀의 반

 

짝거리는 분홍색 머리 가죽에 쏟아져 내리며 이제 그녀가 거의 완전히 대머리가 됐음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아, 얼마나 늙어 보이던지! 몹시 여위고 아주 많이 작아져 있었다. 내가 알던 거대한 덩지는 다 어디로 갔는가? 왜 회색 태피터 천 드레스를 입고 나직하게 협박을 속삭이지 않는가? 왜 그토록 가련해 보여야 하는가?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연민이나 자비를 닫아버렸다. 연민이나 자비는 그녀가 우리에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는 잠이 막 들려는 참처럼 보였지만, 문이 열리자 천천히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고는 눈이 튀어 나올 듯 커졌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았다. 그녀의 가늘고 쪼글쪼글한 입술이 떨고 있었다. 영광의 할렐루야! 나의 때

 

가 찾아왔다! 그럼에도 나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어어서 열린 문앞에 잠깐 멈추어 섰다. 나는 복수를 위해 왔다. 그러나 시간이 내게서 강도질을 해간 것만 같았다.

왜 그녀는 내가 기억하는 그 괴물이 아닌가? 왜 위풍당당하던 예전의 그녀가 아닌가? 그녀가 지금 같은 모습이 아니라 예전의 괴물이기를 원했다. 머리 거죽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머리칼이 다 빠져버린 늙고 병든 여인의 모습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은 머리 꼭대기까지 올려져 분홍색 새틴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리본

 

이 그녀의 모습을 엽기적인 소녀처럼 보이게 했고 머리칼은 한데 다 모아도 내 새끼손가락 굵기도 안 될 듯했다. 다 닳고 허옇게 바래버린 수채화용 붓처럼 보였다.

한때 그녀는 180센티미터가 넘었고,100킬로그램 가까운 몸무게에, 거대한 가슴은 콘크리트 산봉우리처럼 서 있었다. 이제 그 가슴은 낡은 양말처럼 부풀어 오른 배에 늘어져 있었다. 팔은 늙고 시들고 메마른 나무 막대기가 되었고, 손은 힘줄이 불거졌으며, 손가락에는 옹이(나무의 거죽처럼)가 져 있었다. 작은 시계가 쉼 없이 째깍거리고 우

 

리는 서로 입도 뻥긋하지 않는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도, 그녀의 그 야비한 성미가 눈 속에서 불꽃처럼 일렁이며 분노를 드러냈다. 그녀는 내게 나가라고 명령을 내리기 위해 입을 벌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악마의 씨앗' 할 수만 있었다면 외쳤을 것이다. '내 집에서 썩 나가! 악마의 씨앗, 나가, 나가, 나가란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반면에 나는 즐겁게 그녀에게 인사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친애하는 할머니. 다시 뵙게 되다니, 이 얼마나 좋아요? 저 기억하세

 

요? 캐시예요. 할머니가 엄마를 도와 숨겼던 할머니 손주들 중 한 명이요. 소풍 바구니에다 매일 음식을 담아 오셨지요. 매일 아침 6시 반이면 항상 오셨잖아요. 보온병에 우유를 담고, 다른 보온병에는 미지근한 수프를 담아서요. 통조림 수프가 들어 있었죠. 왜 단 한 번이라도 뜨거운 수프를 가져다주실 수 없었을까요? 일부러 따듯한 정도로만 데운 거예요? 나는 방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았다. 그제야 그녀는 내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버들회초리를 알아보았다. 나는 버들회초리를 손바닥에다 툭툭 두들겼다.

 

할머니. 내가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 어머니를 채찍질한 날 기억하세요? 어떻게 할아버지 앞에서 옷을 벗기고 채찍질을 했는지요? 그녀는 다 자란 어른이었어요. 그건 뻔뻔하고 사악하고 나쁜 행동이었어요. 동의하지 않으세요? 그녀의 겁에 질린 회색 눈이 회초리에 고정되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끔찍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기뻤다. 그녀가 노망은 아니라는 얘기를 바트가 해준 것이 너무도 기뻤다. 창백하고 물이 새는 잿빛 눈, 가장자리에 붉은 테가 생기고, 깊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이

 

었다. 주름은 피가 흐르지 않는 베인 자국 같아 보였다. 기다란 매부리코 밑에 거미줄 모양으로 사방팔방 깊게 파인 주름 아래 입술이 새겨져 있었다. 가늘고 일그러져 있던 입술은 이제 그 깊은 주름때문에 작은 단춧구멍 크기로 줄어들어서 쪼글쪼글 오므라져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 믿을 수나 있겠는지, 노란색 면 저고리 높이 꽁꽁 여민

목선 부근에 '그'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꽂혀 있었다. 코바느질로 뜬 하얀 옷깃을 단 회색 태피터 드레스의 목선에 꽂혀 있지 않은 때를 본적이 단 한 번도 없더 그 다이아몬

 

드 브로치. 할머니. 내가 말을 이었다. 쌍둥이 기억하세요? 할머니가 이 집으로 끌어들이고 나서는 단 한 번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작고 사랑스러웠던 다섯 살짜리들요. 당신은 그 애들을 어떤 이름으로도 부르지 않았죠. 코리는 죽었어요. 그거야 아실 테고, 하지만 제 어머니가 캐리 얘기도 하던가요? 캐리도 죽었어요. 그 애는 많이 크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가장 필요한 시기에 햇볕과 신선한 공기를 도둑맞았으니까요. 사랑과 안정도 도둑을 맞고, 행복 대신에 트라우마만 남았죠. 크리스와 저는 지붕에 나가

 

앉아서 햇볕을 쬐었어요. 하지만 동생들은 높은 지붕을 무서워했죠. 우리 둘이 거기 나가서 몇 시간이고 있었다는 거 아셨나요? 아니에요, 몰랐을 거예요. 그렇죠?

그녀가 얇은 매트리스 속으로 쪼그라들려고 시도하려는 듯 약간 몸을 움직거렸다. 그녀의 두려움에 통쾌한 기분이 들었고, 그녀가 약간이나마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기뻤다. 그녀의 눈은 이제 예전의 나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고, 그 공포에 질린 온갖 감정이 유리창에 반사되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는 도와달라고 소리칠 수가

 

없다! 오로지 내 처분 아래 놓여 있다. 내가 다시 말을 했다. 둘째 날 밤 기억하세요, 세상에서 가자 친애하고 사랑스러운 할머니? 캐리의 머리채를 잡아서 공중으로 들어 올리셨죠? 아프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도 상관하지 않고 그런 짓을 하셨죠. 그러고는 단 한 방에 코리를 데굴데굴 굴려 보내고요. 코리는 단지 자기 누나를 보호하려고 한 일일 뿐이었어요. 불쌍한 캐리, 코리의 죽음을 얼마나 애통해 했는지, 캐리는 코리의 죽음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고,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한시도 접지 못했어

 

요. 캐리는 알렉스라는 이름의 착한 청년을 만났었는데요, 둘은 사랑에 빠졌고 결혼하기로 했는데, 그는 목사가 되려고 했고 캐리가 그걸 알았어요. 그게 캐리를 온통 흔들어 놓았어요. 있잖아요. 당신이 우리 모두 다 종교를 가진 사람을 몹시 두려워하게 만들었어요. 알렉스가 목사가 되겠다고 말한 날부터 캐리는 절망적인 우울증에 빠졌어요. 캐리는 할머니가 아주 잘 가르쳐주신 교훈을 익힌 터였죠. 당신은 우리 중에 하느님을 기쁘게 할 만큼 완벽한 애는 결코 없다고 말했죠. 캐리가 충격과 우울에 빠지고

 

더 이상 살아갈  기력이 없어지던 날에 잠자고 있던 무언가가 되살아났어요. 자, 이제 그 애가 그래서 어떻게 했는지 들어보세요. 당신 때문에 한 짓이에요! 당신이 그녀의 어린 머릿속에 그녀가 악하게 태어났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제아무리 갖은 노력을 기울여도 사악해질 거라고 각인을 해놓았기 때문이에요! 캐리는 당신 말을 믿었어요! 코리가 죽었어요. 코리가 가루 설탕 뿌린 도넛에 바른 비소 때문에 죽었다는 걸 캐리도 알았죠. 그래서 삶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느끼자, 캐리는 쥐약을 샀어요!  열두

 

개들이 도넛을 사고 비소투성이인 쥐약을 거기다 발랐다고요! 그리고 하나만 빼고 다 먹었어요. 남은 하나에도 물었던 자국이 있었어요. 자....이제 매트리스 속으로 쪼그라져 들어가서 당신이 마땅히 가져야 할 죄의식에서 도망치려고 애써보시죠! 당신과 어머니는 코리를 죽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캐리도 죽인 거예요! 난 당신을 경멸한다고, 이 늙은이야! 내 어머니를 더 증오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우리를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기에 그녀가 한 일은 그 무슨 일이라도 절대로 예상하지 못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를 제 속으로 낳고, 보살피고 아빠가 살아 있을 때 우리를 열심히 사랑해주던 어머니라면 얘기가 달랐다. 참을 수 없고 경악할 만한,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얘기였다! 그리고 그녀의 때도 올 것이다! 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요. 할머니. 캐리도 죽었어요. 코리가 죽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요. 그렇게 해서 코리와 함께 천국에 있고 싶었던 거예요. 그녀의 눈이 찌푸려지고 이불로 작은 전율 같은 것이 일렁였다. 나는 흡족했다. 나는 몇 시간을 들여 모으고 빗질을 해서 한 줄로

 

길게 녹아내린 황금처럼 반짝이는 가닥으로 만들어둔 캐리의 머리카락을 상자에 담아 온 터였다. 양쪽 끝은 각각 빨간색과 보라색의 새틴 리본으로 묶었다. 봐요, 늙은이야. 이건 캐리의 머리카락이에요. 머리카락의 일부죠. 흐트러지고 엉킨 머리카락을 담은 상자가 또 있어요. 도저히 버릴 수가 없어서 가지고 있는 거죠. 크리스와 나를 위해서만 간직한 게 아니라 당신과 우리 어머니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간직해둔 것이기도 해요......당신들 둘이서 코리를 확실히 죽여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캐리도 죽였으니

 

까요! 아, 나는 증오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복수심이 활활 끓어올라 눈이 이글거리고, 울화가 치밀고, 손이 떨려왔다. 사경을 헤매며 나이들고 이울어가던(쇠약해지던) 캐리의 모습이 보였다. 늘어지고 창백해진 피부에 덮인 작은 해골이 될 때까지 뼈밖에 남지 않고 말라가던 캐리, 너무 창백해서 핏줄이 다 보일 지경이었다. 유해는 예쁜 쇠 상자에 재빨리 봉해서 부패의 악취를 차단해야 했다. 나는 침대 가까이로 가서 그녀의 벌어지고 겁에 질린 눈앞에 화사한 리본이 달린 밝은 머리칼을 흔들었다. 참

 

아름다운 머리카락 아니에요 할머니? 할머니 머리카락은 한 번이라도 이렇게 아름답고 풍성했던 적이 있나요? 아니죠! 그랬을 리가 없다는 거 알아요! 할머니에 관한 것이라면 아무것도 예뻤을 리가 없어요. 아무것도! 젊을 때도 그랬을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 남편의 의붓어머니(교통사고로 죽은 캐시 아버지의 어머니, 캐시의 친할머니)에게 그토록 질투를 했던 것이겠지요. 그녀가 움찔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웃었다. 그래요, 친해하는 할머니, 전 예전보다 할머니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의 사

 

위분이 내 어머니가 말해준 가족의 온갖 비밀을 내게도 알려주었거든요. 당신 남편 맬컴은 자기 아버지의 어린 아내(캐시 아버지의 어머니)-돌런갱어 집안은 대대로 근친상간으로 얼룩졌다-와 사랑에 빠졌지요. 당신보다 열 배는 아름답고 착했던 그 여자와요! 그래서 얼리셔(캐시의 친할머니)가 아들(아버지)을 낳았을때, 당신은 그 아이가 당신 남편의 자식이 아닌지 의심했던 거예요. 그게 당신이 우리 아버지를 증오했던 이유고, 아버지가 좋은 집에 들어가게 됐다고 생각하도록 속이고 아버지를 불러들여서

 

함께 산 이유였어요. 그리고 그를 교육시키고 온갖 좋은 걸 다 해줘서 부유하고 멋진 삶에 취미를 붙여놓고, 나중에 그를 내쫒고 당신 유언에 아무것도 남지지 않았을 때 더 상처 받고 실망하게 만들려는 거였어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당신을 바보로 만들었죠. 안 그래요?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딸을 훔쳐 갔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그녀도 증오했었죠. 당신 남편이 당신보다 그녀를 더 사랑했으니까요. 그리고 이복 삼촌이 이복 조카와 결혼을 한 거예요. 한데 당신이 맬컴과 얼리셔에 관해 얼마나 틀렸느냐 하

 

면요, 내 아버지의 어머니는 당신 남편 맬컴을 경멸했어요! 그녀는 그를 내치느라 싸움깨나 했어요. 그리고 그녀가 낳은 아기는 당신 남편의 아들이 아니었어요! 맬컴이 마음대로 했더라면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만요! 그녀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에게 과거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오로지 현재와 내 손에 들린 회초리만이 중요했다. 이제 뭘 좀 말씀드리려고 해요, 할머니. 할머니가 아셔야 할 일이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우리 아버지보다 훌륭한 사람은 없었고, 그의 어머

 

니만큼 지조 있는 분이 없었어요. 하지만 거기 누워서 내가 얼리셔나 내 아버지의 경건한 성격을 물려받았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난 당신하고 같으니까요! 무정하죠! 난 절대로 잊지 않고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요! 코리와 캐리를 죽인 이유로 당신을 증오해요! 이런 나로 만든 죄로 당신을 증오해요! 나는 정신이 나가서 복도 저편에 간호사가 낮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고함을 질러댔다. 비소 한 줌을 그녀에게 먹이고 앉은 뒤, 캐리가 그랬던 것처럼 죽고 썩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싶

 

었다. 나는 열을 식히려고 내 근사한 젊은 몸을 뽐내며 다리를 차고 방안에서 피루엣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멈추고 그녀의 면전에 대고 몰아붙였다. 당신이 우리를 가둬둔 그 모든 세월 동안에 당신은 우리의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았죠. 천생 우리 아버지 모습인 크리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고요. 당신 남편, 그가 젊고, 당신이 그도 악마로 만들기 전 당신 남편의 모습도 크리스에게는 있었겠지요. 당신은 인간이 잘못된 모든 탓을 인간의 사악한 영혼에 돌리고, 진실은 무시했어요. 돈이야말로 이 집안을 지

 

배하는 신인데 말이죠! 최악의 일이 벌어지게 만드는 건 항상 돈이었어요! 그리고 탐욕이 우리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고, 탐욕이 우리를 여기에 가둬놓고, 우리 생에서 3년하고도 4개월을 훔쳐갔어요. 그동안에 당신은 우리를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었죠. 당신에게는 자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어요. 당신의 손주들에게도, 생전 처름 갖는 그 손주들에게도 그 어떤 인정도 봐주지 않았어요. 우린 당신을 만진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있었나요? 처음에는 시도를 하려고 했지만요. 기억해요? 나는 침대에 뛰어올라 캐

 

리의 황금빛 긴 머리로 그녀를 후려쳤다. 부드러운 채찍이라 아플 것도 없었을 테지만, 그녀는 그것이 닿은 것만으로도 움츠려들었다. 그다음에 나는 캐리의 소중한 머리카락을 침대 옆 탁자위에 내려놓고 그녀의 눈앞에서 버들회초리를 찰싹 거렸다. 나는 그녀의 침대위에서, 그녀의 얼어붙은 몸 위에서 춤을 추고 몸을 빙그르 돌리며 내 유연한 동작과 황금색으로 동그라미 모양을 그리며 물결치는 긴 머리카락을 과시했다. 우리가 우리 어머니도 증오하기 전에 당신이 그녀를 어떻게 벌했는지도 기억하시죠?

 

그건 제가 빚을 졌네요. 내가 그녀의 이불 덮은 몸 위에 다리를 벌리고 서서 말했다. 당신의 목부터 발꿈치까지, 제가 빚을 졌어요. 더불어서 크리스와 내게 내린 채찍질, 그것도 제가 갚아야 할 빚이에요. 그리고 다른 모든 것도 내 기억 속에 하나도 빠짐없이 새겨져 있어요. 채찍이 내 손에 들리고, 당신이 절대로 먹지 못할 음식이 주방에 있을 날이 올 거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흠...그날이 왔어요, 할머니. 여윈 얼굴의 푹 꺼진 잿빛 눈이 증오와 적으로 강하게 번뜩였다. 쳐보려면 쳐보라고 도전하고 있

 

었다. 뭐부터 시작해볼까요? 내가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회초리부터 들까요, 아니면 머리카락에 타르를 바르는 일부터 할까요? 타르는 어디에서 구했던 거죠, 할머니? 그게 항상 궁금했어요. 사전에 준비를 하고 사용할 구실이 생길 때까지 기다린 건가요? 이제 당신이 모르는 얘기를 고백하려고 해요. 크리스는 내 머리카락을 다 잘라내지 않았어요. 내가 민머리가 됐다고 당신을 속여 넘기기 위해 앞머리만 자른 거예요. 머리를 싸고 있던 수건 아래에 그가 살려낸 머리카락이 다 있었다고요. 그래요. 할머니,

 

사랑이 제 머리를 자르지 않게 해주었어요. 그는 몇 시간이고, 몇 시간이고 있는 힘을 다해 내 머리카락을 살려내려고 애썼어요. 당신은 결코 알 길이 없을 큰 사랑으로요. 그것도 오빠에게서 받는 사랑으로요. 그녀의 목 저 깊은 곳에서 쥐어짜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말을 할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할머니. 내가 그녀를 내려다보려고 허리에 손을 짚고 몸을 숙이며 조롱했다. 타르를 어디에서 구했는지 말해주지 않을래요? 전 통 찾을 수 없더라고요. 근처에 도로 공사를 하는 곳도 전혀

 

없고요. 그래서 뜨거운 왁스를 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할머니도 녹인 왁스를 쓰셔도 될 뻔했어요. 타르만큼이나 꼭 효과가 있었을 테니까요. 초 몇 개를 녹여 쓸 생각은 들지 않던가요? 나는 위협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보이기를 바랐다. 오, 친애하는 할머니. 당신과 나는 이제 큰 재미를 볼 거예요. 그리고 아무도 모를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은 말도 할 수 없고, 글로도 쓸 수 없으니까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거기 누워서 고통을 겪는 것밖에 없으니까요. 그렇게 내뱉었지만 나 자신

 

도, 내가 하고 있는 말도, 내가 느끼는 기분도 싫었다. 나의 의식이 천장 근처를 맴돌며 하얀 타이즈를 입고서 격분을 풀어놓고 있는 나를 수치스러운 마음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위에 있는 나는 두 번의 뇌졸중을 겪어낸 늙은 여인을 경악해서 바라보며 측은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침대 위에는 다른 종류의 내가 있었다. 악랄하고 비열하고 앙심을 품은 푸른 눈의 폭스워스가 있었다. 그녀가 예전에 나를 바라볼 때 그랬던 것만큼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나는 급작스럽고도 무자비하게 몸을

 

꺾었다.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시트와 담요를 홱 벗겨내서 그녀의 몸을 드러냈다. 그녀의 의복은 병원에서 입는 환자복과 같았다. 뒤가 트여서 줄로 묶여 있고 앞에는 트임이 없었다. 아무 장식 없는 노란색 옷의 목 근처에 어울리지 않는 브로치만 달려 있을 뿐이었다. 관에 들어갈 때 입을 옷에도 달 것임은 안 보고도 뻔했다.

나체.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크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옷을 벗어야 했다. 옷을 입지 않은 수치심에 그녀도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때 경멸의

 

눈빛을 받는 그녀의 쪼글쪼글한 몸은 더 작아질 것이다. 나는 인정사정없이 그녀의 허술한 싸구려 환자복을 움켜쥐고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그녀의 겨드랑이 쪽으로 끌어 올렸다. 다림질을 하지 않고 구깃구깃하게 접힌 옷이 그녀의 얼굴을 반쯤 가렸고, 나는 그녀가 어찌어찌 지을 수도 있는 표정을 가리면 안되었겠기에 옷을 뒤로 조심스럽게 벗겼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냉혹한 눈과 칼로 베인 듯한 입술로 나를 쳐다보았던 저 옛날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경멸과 혐오감을 표정에 드러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

 

다. 내 나이 열네 살의 어린아이였을 적에 거울을 들여다보며 생전 처음 보는 나체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다가 그녀에게 걸리고 말았을 때 그녀는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젊을 때의 몸은 아름답다. 보기에 기쁜 달콤하고 젊은 굴곡과 티 없는 피부, 단단하고 팽팽한 살. 아, 하지만 그 육신은 하릴없이 늙고 마니! 저 콘크리트 같던 쌍둥이 언덕은 축 늘어진 젖통이 되어 허리께까지 늘어져 있고, 젖꼭지는 그 가장 아래 커다란 갈색 덩어리로 달려서 얼룩덜룩하고 울퉁불퉁했다. 가슴에 도드라진 푸른 정

 

맥은 반 투명한 피복에 싸인 밧줄같이 보였다. 피부는 출산으로 인한 임신선 때문에 쭈글쭈글해지고 고랑이 지고 구깃구깃했고, 배꼽에서부터 털이 거의 없는 음부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를 보니 자궁절제술이나 제왕절개 수술을 받은 듯 했다. 오래된 흉터였고, 주변의 반죽 같고 하얗고 쭈글거리는 피부보다도 색이 더 흐리고 반들거렸다. 그녀의 가늘고 긴 다리는 지친 나무처럼 옹이가 져 있었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언젠가는 나도 이런 모습이 될까? 그러나 측은하게 느끼거나 상냥하게 굴려는 마음은 없었다.

 

나는 그녀를 굴려서  침대 가운데 엎드리게 했다. 그러는 내내 크리스와 내가 했던 농담에 관해 주절거렸다. 그녀가 옷에다 못을 박거나 본드를 붙였을 거고, 불을 끄지 않고서는 벽장 안에서 속옷도 절대로 벗지 않을 것이라고 크리스와 나는 농담을 하곤 했다. 등은 그래도 앞보다는 덜 피폐했다. 엉덩이가 납작하고 늘어지고 너무 하얗기는 하지만. 이제 채찍질을 하려고 해요, 할머니.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내 심장은 이제 사라져 있었다. 할머니, 기회가 생긴다면 하고 말겠다고 오래전 약속을 드렸죠. 그러

 

니까 할 거예요! 그러고는 눈을 감고 이제 하려는 일에 대해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팔을 들어 올렸다가 있는 힘껏 내리치면서 그녀의 맨 엉덩이에 버들회초리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몸을 떨었다. 무슨 소리가 그녀의 목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그러고서 그녀는 의식을 잃고 가라앉는 것처럼 보였다. 긴장이 풀어지면서 그녀는 방광의 힘도 풀었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 방에 딸린 욕실로 수건과 비누를 가지러 갔다가 화장지를 가져와 서둘러 닦아주면서 끔찍한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러고는 그녀를 씻기고, 내가 낸

 

끔찍한 채찍 자국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그녀를 돌려 눕히고 옷을 제대로, 깔끔하게 덮어주고 나서야 그녀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확인할 생각이 났다. 그녀의 회색 눈이 뺨에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나를 표정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내가 계속 흐느끼고 있는 가운데, 그녀의 눈이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승리감으로 천천히 빛나기 시작했다. '겁쟁이! 네가 물러빠진 약골 말고는 뭐가 되겠는지 내 진작 알고 있었지! 배알도 없고 속도 없어! 날 죽여. 해봐. 죽이라고! 죽이라잖아. 해보란 말이야!' 그녀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서재로 달려가서 전에 본 적이 있던 응접실로 갔다. 분노로 돌 지경이 된 나는 눈에 보이는 첫 촛대를 집어 들고 그녀에게 다시 달려갔다. 하지만 성냥이 없었다. 서재로 돌아가서 바트가 사용하는 책상을 뒤졌다. 그는 담배를 태웠다. 성냥이나 라이터가 있을 것이었다. 이 지역 디스코텍에서 가져온 종이성냥이 눈에 띄었다. 아이보리색 초는 이 집처럼 위엄이 있었다. 이제 그녀는 눈에 공포가 서렸다. 그녀는 분홍색으로 묶은 그 빈약한 머리 다발이나마 지키

 

기를 원했다. 나는 초에 불을 붙이고 불꽃이 올라오는 것을 본 다음, 초를 기울려서 그녀의 머리카락과 두피에 녹은 촛농을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예닐곱 방울을 떨어뜨리고는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옳았다. 나는 겁쟁이였다. 그녀가 우리에게 했던 짓을 나는 그녀에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로 피가 두 번이 겹친 폭스워스 사람인데, 그런데도 신은 폭스워스의 틀에 맞지 않는 사람으로 나를 바꾸어 놓았다. 나는 아이보리색 초의 불을 끄고 촛대에 다시 넣은 다음 방을 떠났다. 무도회

 

장에 들어서는 순간에 소중한 캐리의 머리칼을 깜박하고 왔다는 게 기억났다. 그걸 가지러 다시 달려갔다. 외할머니는 내가 두고 갔던 대로 누워 있었고, 머리만 캐리의 아름다운 머리카락 다발이 있는 곳으로 돌리고서 두 눈에 커다란 눈물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 이제 나는 혹독한 짐을 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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