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우소--3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3

Hopefortomorrow 2015. 4. 5. 10:58

돌런갱어 시리즈--2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3

 

조리는 불루블랙 고수머리와 창백하고 크림같이 부드러운 살결, 아주 진하디 진한 파란색 눈을 갖고 태어났다. 그는 줄리언이 온전히 살아 돌아온 듯했다.

처음부터 조리는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아는 듯 해 보였다. 내 목소리와 내 손길, 내 발자국 소리마저 아는 것 같았다. 조리는 캐리에게도 나에게 못지않게 크나큰 사랑을 받았다. 캐리는 매일 밤 폴의 진료실에서 곧장 집으로 달려와서, 아이를 품에 안고 몇 시간이고 함께 놀아주었다.

 

크리스가 우리가 따로 살 곳을 장만해야겠다고 말했지만 나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크리스는 조리의 아버지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고 싶어했다. 폴의 집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폴의 커다란 집을 사랑했고 그와 헤니와 함께 지내는 것이 좋았다. 조리를 유모차에 태워 밀고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고 조리는 그런 환경이 필요했다. 이집을 떠나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크리스는 하늘 높이까지 쌓인 내 빚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윗층에 폴이 아기 방을 만들었다. 침대와 요람, 아기가 가지고 놀아도 다치지 않을 플러시 천 봉제 인형 여남은 개로 장식해 새로 꾸민 방이었다. 크리스와 폴이 같은 장난감을 들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는 때도 있었다.둘은 그때마다 서로 민망해 했다. 그러면 내가 말했다. 생각이 똑같은 두 남자라니. 그런후 둘 중 하나에게서 받은 선물은 반품을 해야했다. 하지만 누구의 선물을 반품했는지는 절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캐리는 열일곱 살이 되던 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녀는 대학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고, 폴의 개인 비서로 지내는 데 더없이 만족했다. 작은 손가락이 타자기 키보드 위를 날개 달린 듯 날아다녔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작은 몸집과 상관없이 자기를 사랑해줄 누군가를 여전히 소망하고 있었다.

캐리의 불행한 모습을 보면 엄마를 향한 분노가 들끓었다. 또다시!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떻게 할지 곱씹었다. 이제 나에게는 나를 주저앉힐 남편도 없었고 캐리가 댓

 

가를 치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댓가를 치르게 만들 자유가 있었다. 폴과 크리스가 나를 두고 다투고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을 날마다 보았다. 중간에 줄리언만 끼지 않았다면, 나는 폴의 아내가 되었을 테고 조리는 폴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폴과 크리스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오직, 엄마의 남편 바트 윈슬로에게 접근하기 위한 계략에 신경을 썼다.  엄마 코린보다 훨씬 젊은 나, 그가 넘어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이다.

 

캐리는 조리가 일찍 말을 트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캐리가 아니었으면 조리는 말을 더 늦게 배웠을 것이다.

작은 캐리가 남자를 사귀는데에 있어서 걸림돌이 무엇일까? 캐리는 나에게, 언니는 장미꽃 같아. 모든 벌이 언니에게 날아가. 그리고 너무 낮은 곳에 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지. 나한테 기회가 오기 전에는 제발 재혼하지 말아줘. 어떤 남자라도 내 쪽을 보면 주변에 있지 마. 부탁이야. 그 사람한테 미소 짖지 말아줘.라고 했다. 이런 말을 나에

 

게 할 정도로 그녀의 작은 체구는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콤플렉스였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폴은 2년간에 걸쳐서 구애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크리스는 클레어몬트에서 인턴 생활을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존중하고 예를 지켰기에 서로 상처를 입힐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둘 사이에 놓인 장애물 얘기를 하지도 못했다.

 

인턴생활을 끝내고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한 크리스가 어느날 기량을 더 쌓기 위해 훨씬 더 저명한 병원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와 조리를 데려가고 싶어했다. 캐리는 폴곁에 남겨둬야하고. 하지만 난 반대를 했고 그를 설득했다. 오빠의 이상형이 엄마라지만 엄마를 닮은 유일한 여자가 나는 아닐거야. 제발 다른 여자를 찾아봐. 오빠가 뭘 걱정하는지는 아는데 폴도 내가 꼭 필요한 게 아니야. 그랬다면 당장 결혼하자고 졸라댔겠지.

 

크리스가 쓸쓸히 떠났다. 나는 울었다. 장미 정자에 앉아 한 없이 울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결 쉬워질 것이었다. 크리스가 상처 받게 하지 않으려고 폴을 밀어내는 짓은 더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젠 폴에게 가는 분명한 직선도로가 생겼다.

하지만 나의 어머니가 남편과 함께 그린글레나로 돌아오는 신문 기사를 보고는 생각을 바꿨다. 그리고 전혀 계획에 없던 일에 착수했다. 우선 돈이 필요했다. 나에겐 줄리

 

언이 남겨놓은 빚밖에 없었다. 줄리언의 모친인 마리샤의 발레학교에 조수가 필요할 것 같아서 나를 써 달라고 했다. 그리고 운영할 사람도 나일 것이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자신의 학교를 차지하려 들까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녀는 여기 대장은 나이고 내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대장은 나야라고 했다. 그녀와 같이 일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할 수없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폴의 집을 떠나야했다. 폴에겐 크리스의 허락이 있어야 결혼을 하고 캐리에게

 

기회가 올때까지 나는 결혼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했다. 너 자신의 집을 마련하고 네 발로 서보면서 너 자신을 찾아봐. 그리고 어른답게 행동할 만큼 철이 들었다고 느껴지면 내게 돌아와.

나는 클레어몬트와 그린글레나의 중간쯤 되는 곳에 자그만한 집을 빌려 자리를 잡고 나자마자, 코린에게 보낼 협박편지 작성에 들어갔다. 나는 빚더미에 앉았고 아이가 딸

 

린데다 캐리까지 있었다. 폴에게서 신세지고 싶은 생각은 이제 추호도 없었다. 그는 내게 할 만큼 했다. 아빠가 죽은 후 엄마는 자기어머니에게 편지를 쓴 것처럼 나 역시 엄마에게 편지 쓰는 거 말고 뭘 할 수있었겠는가. 쥐꼬리만한 100만 달러쯤 왜 요구하지 못하겠는가. 그녀는 우리에게 빚을 졌다. 그녀가 가진 것은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그건 부정할 수없는 사실이었다. 그 돈으로 내 빚을 전부 갚고, 폴에게도 갚고, 캐리를 더 행복하게 해줄 길을 찾을 수 있다. 만약 내가 어느 면에서 그녀가 했던 짓과 같은

 

일을 하는 거라서 수치스러워지면, 그녀 자신이 저지른 짓 때문이라고 합리화하면 된다.

숱한 편지지를 구겨버리고 난 다음에 완벽한 편지를 썼다. 내가 생각하기에 갈취를  목적으로 이보다 더 잘 쓴 편지는 있을 수 없었다.

'친애하는 윈슬로 여사님께, 옛날 옛적에 펜실베이니아 주 글레드스톤에 사람들이 입을 모아 드레스덴 인형이라고 부르던 네 명의 아이를 둔 부부가 살았습니다. 그 인형

 

들 가운데 하나는 외로운 무덤에 누워 있고 다른 하나는 햇볕과 신선한 공기를 누리며 살고 가장 필요할  때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았다면 잘 자랐을텐데, 그러지 못해서 몸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발레리나 인형에게는 제 속으로 낳은 아들이 생겼고, 돈이 별로 없습니다. 저도 압니다. 윈슬로 여사님. 당신이 당신의 화창한 나날에 그림자를 드리운 아이들에게 연민 따윈 느끼지 않는다는 걸요. 그러니 곧장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발레리나 인형이 백만 달러를 지급할 것을 요구합니다. 당신 몫으로 수천만, 혹

 

은 수십억 달러를 가지고 계실 테니까요. 그 액수를 제가 지정한 사서함으로 보내시길 바랍니다. 윈슬로 여사님,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바살러뮤 윈슬로 씨, 그 변호사님의 귀가 끔찍한 사연으로 채워지리라는 걸 명심하세요. 그의 귀에 그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기를 당신이 바라신다는 거, 제가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요. 진심을 다해, 당신의 발레리나 인형, 케서린 돌런갱어 마르케로부터-'

 

하지만 돈은 오지 않았고 나는 매일같이 기다렸다. 그래도 편지를 계속 썼다. 쓰고 또 썼다. 마음속에서 격렬한 분노가 커져가는 사이에 이레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편지를 부쳤다. 내가 바란 액수는 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 돈 가운데 일부는 어쨋거나 우리 것이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고 새해가 왔다.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했다. 나는 그린글레나 전화번호부에서 번호를 찾아 바살러뮤 윈슬로 변호사와 신속하게 약속을 잡는데 성공했다.

 

2월이었고 조리는  세 살이 되었다. 헤니와 캐리에게 조리를 맡기고서 내가 가진 최고로 좋은 옷을 차려입고 머리에도 잔뜩 멋을 부린뒤, 우아하고 호화롭게 장식한 사무실로 들어가서 어머니의 남편을 응시했다. 엄마의 투박한 듯 잘 생긴 남편이 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짙은 갈색 눈이 나를 알아보았다. 그가 말했다. 살아서 숨을 쉬다보니 이런 일이 다 있네요. 당신에게 변호사가 필요하고 그것도 저를 택해주셨다니 무슨 이런 마법같은 일이. 왜 이 동네에 와 계신지는 상상조차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

 

내가 발레광이고 나의 공연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았고 그래서 자신도 발레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아내는 두 분이 나오지 않는 발레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고 했다. 그는 내 손에 자기 입술에 들어 올려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남편얘기를 했고 그는 죽었고 보험사에서 보험금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게 당신을 찾아온 이유라고 했다.그는 열에 들떠 말을 계속했다. 두 분 무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가 죽었다니 안타까운 일이군요. 제 아내는 너무나도 감동을 받아서 우는 모습까지 본 적도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줄리언의 보험증서를 내밀었다. 자살 조항은 보험을 든 지 2년후에는 말소가 된다고 말해줬다. 그는 돈이 당장 필요하냐고 물었고 나는 청구서가 수백 장이 쌓여 있고 부양할 아들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열흘이 지나지 않아 10만 달러짜리 수표를 들고 내가 결국 일하게 된, 줄리언의 모친 마담 마리샤가 운영하는 발레학교로 나를 찾아왔다. 몸에 딱 붙는 타이트한 발레복을 입은 내게서 그는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가 말했다. 다음 주 화요일에 저녁식사를 합시다. 수임료 얘기는 그때 합시다.

 

화요일 밤에 그가, 바트 윈슬로가 우리의 자그만한 집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중식당에 데려갔고 자신이 본 여인중에 자신의 아내만 빼놓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며 추켜세웠다. 그가 나의 계획에 알아서 말려 드는 것만 같았다. 곧 버지니아 주에 사무실을 열러 곧 떠난다고 했던 것이다. 난 모른척 하고 그곳으로 가고 폭스워스홀 근처에 살면 되는 것이었다. 모든게 순조로웠다. 이젠 진짜 복수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캐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울부 짖었다. 캐리는 폴과 헤니를 떠난다는 생각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폴 아저씨와 헤니 아줌마와 있을테니 언니는 가고 싶은 데가 있으면 어디로든 가고 난 내버려둬. 아저씨는 언니를  필요로 한다는 거 몰라? 그분 상처 입히는 거는 상관도 안해? 언니는 언제나 그분에게 상처를 입혀!

슬펐다. 캐리, 언니를 이해해줘, 난 속으로 그렇게 울었다. 나는 폴에게 갔다. 내가 어디로 가며, 왜 가는지 말했다. 그의 눈이 멍해졌다. 그래, 네가 그곳에 돌아가서 네 어

 

머니와 맞서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 그동안 줄곧 그랬다. 네가 계획을 세우는 걸 봐왔고, 나도 함께 가자고 부탁해주기를 바랬어.

저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예요. 그의 두 손을 잡았다. 알아주세요, 전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리라는 걸 알아주세요.

안다. 그가 선선히 대답했다. 행운을 빌어, 나의 캐서린 너의 행복을 빌어. 내가 필요할 때면, 혹시라도 내가 필요하거든, 난 이곳에 있을거야. 기다리고 있을게.

 

난 울었다. 나는 그를 받아들일 자격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는 나같은 인간에게는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크리스에게도 캐리에게도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리지 않았다. 편지를 보고 내 주소가 바뀐 것을 보았을 때 알게 될 일이었다.

5월, 캐리의 스무 번째 생일 다음 날이었다. 크리스가 없는 생일 파티를 치르고 나서 폴의 집 진입로에서 차를 뺐다. 폴이 손을 흔들었다. 백미러로 보니 그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쳐내고 있었다. 헤니는 우리를 계속 바라보았다. 온갖 것을 다 말하는 그녀의 눈에 쓰인 말이 보였다. 바보, 이곳을 떠나다니, 좋은 사람을 떠나다니..

여동생과 아들을 옆 좌석과 뒤에 태우고 버지니아 주의 첩첩산중으로 가겠다고 나선 그 화창했던 날은 나의 어리석음을 가장 확실히 증명해 주는 날이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우리가 투옥되었던 장소에서 복수를 모색하려는 본능은 물리칠수가 없었다.

 

바트 윈슬로가 이전한 사무실 근처로 이사가는 걸 그가 눈치챌수 없도록 수임료 200달러를 직접주지 않고 우체통에 넣었다. 우연을 가장하기 위해선 당분간 그를 만나서는 안될 일이었다. 우린 블루리지 산맥으로 곧장 향했다. 이제 캐리는 우리끼리 길을 간다는 생각에 아주 들떠 있었다. 언니, 조리는 정말 아름다워, 난 아이를 적어도 여섯 명은 낳을 거야. 아니면 그보다 더 많이. 그중에 반은 딱 조리처럼 생기고, 반은 언니하고 오빠, 둘이나 셋은 폴을 닮았으면 좋겠어.

 

스무살이된 캐리가 모를리가 없었다. 북서쪽으로 차를 몰고 가는 동안에 비가 내렸고 캐리는 심안과 육안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직감하고 있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 공포가 어려 있었다. 언니, 우리 '그곳'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녀의 물음에 나는 아니, 정확히는 아냐. 라고 얼버무렸다.

미리 연락해둔 부동산 중개업자가 매물을 보여줬고 근사한 정원이 딸린 아주 예쁜 집을 구했다. 침실을 비롯해 방이 다섯 개가 있는 집이었지만 계약금 내고 이것저것 물

 

다 보니 10만 달러가 아주 오래 갈 돈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캐리와 조리가 모텔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나는 발레학교를 팔고 은퇴하려는 교사를 찾아가 흥정을 했고 남은 돈으로 발레학교를 인수했다. 몇 주 지나서 우린 새로운 일상에 안착했다. 나는 동네 약국 위층에 위치한 발레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캐리는 조리를 보살피며 집안일과 대부분의 식사준비를 담당했다. 나는 되도록이면 자주 조리를 데리고 수업에 갔다. 캐리의 일을 덜어주려는 뜻도 있었지만, 조리를 내 곁에 두고 싶어서였다. 나는 조리

 

가 춤을 보고 듣고 느낌을 얻게 해주라고 했던 마담 마리샤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6월 초의 어느 토요일 아침에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안개가 낀 산을 바라보았다. 저 산은 생전 변하지도 않았다. 폭스워스 저택도 여전했다. 1957년으로 시계를 돌려, 캐리와 조리의 손을 잡고 기차역에서부터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갔다. 엄마가 제 자식 네 명을 저 희망과 절망의 감옥에서 고문받고 채찍질 당하고 굶주리도록 내버려

 

두었을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나는 일어났던 모든 일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감옥 방을 탈출하려고 만들었던 나무 열쇠, 엄마의 웅장한 침실에서 훔쳤던 돈, 협탁 서랍에 들어 있었던 성적 쾌락을 담은 그 커다란 책을 발견했던 날 밤. 만약 그 책을 보지 않았다면 어쩌면....어쩌면 일은 다르게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런 나를 캐리가 현실로 불렀다. 언니, 무슨 생각해? 돌아가서 폴과 헤니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해? 캐리, 언니가 얼마나 바쁜지 알잖아.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나의 대답에

 

캐리는 시무룩해졌다가 얼굴이 환해졌다. 집에 새 오븐을 설치 해주는 기사 얘기를 했다. 젊고 잘 생겼다고 했다. 그 사람 이름은 알렉산더 로킹엄이고 알렉스라고 불러달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그녀는 갑자기 희망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나를 보았다. 언니, 그가 데이트 신청을 했어. 나는 내가 발레 수업을 하러 가 있는 동안에 캐리가 이 젊은 남자를 많이 만난게 틀림없음을 알았다. 그 남자가 자기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자는 얘기를 했다는 말을 할 때에는 그녀의 파란 눈이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일주일 후에 알렉스와 폴이 우리 집 식탁에 앉았다. 알렉스는 스무세 살의 잘 생기고 겸손한 청년이었다. 알렉스가 영화를 보여주러 캐리를  데리고 나가고, 조리가 가장 좋아하는 봉제 인형과 함께 침대에 눕고 나서 폴과 나는 벽난로 앞에 늙은 부부처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머니 아직 못봤어? 그가 물었다. 그 사람들 이곳에 있어요. 어머니하고 그의 남편. 폭스워스 홀에 와 있어요. 지역 신문은 그들이 오고 가는 얘기로 가득 차 있어요.

 

외할머니가 가벼운 뇌졸중에 걸렸나 봐요. 그래서 부부가 폭스워스 홀에 머물고 있어요. 폴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집 참 잘 꾸며 놓았구나. 아주 아늑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부드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언제까지고 그를 사랑 할 것이었다. 줄리언이 내 남편이었을때도 그를 사랑했다. 그만큼 내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는 재빨리 옷을 벗어 던졌다. 서로를 향한 열망은 그 모든 세월을 보내고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폴이 돌아갈때쯤 크리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기로 이사온줄 모르고 있던 크리스는 내가 대체 버지니아주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며 소리를 질렀다. 폴이 그곳에 가 있는 것도 알고 네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몰라도 네가 못 하게 폴이 설득할 수 있기를 하느님에게 빌어야겠다고 언성을 높였다. 그가 덧붙였다. 엄마를 상처 입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도 상처 입었다는 건 너도 알잖아. 무엇보다도 네가 다시 상처 받는게 싫어. 나는 황급히 안녕, 이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끔찍한 공황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면서 폴에게 다시 안겼다. 내가 왜 떨고 있는지 그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면서...

폴은 푹 잠들었고 죽은 듯이 고요한 한밤중에 나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산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의 씨앗! 산등성이를 훑고 내려오는 바람이 바스락거리며 할머니가 우리에게 붙여주었던 그 모든 꼬리표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 창에 이마를 대고 저 멀리 어둡고 그늘진 산봉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다락방 창문으로 수도 없이 내다보았던 그 봉우리들이었다. 그리고 맞다. 딱 코리가 그랬듯이, 나는 알았다. 바람이 나를 찾아다니며 늑대처럼 울부짖고 나를 날려버리고 싶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코리를 날려서 메마른 흙으로 만들어버린 것과 꼭 마찬가지로. 악몽을 꾸었을 때는 그랬다. 바람이 나를 해치기 전에 캐리부터  데려갈 것처럼 느껴졌다.

 

캐리는 스무 살, 나는 스물일곱 살이었고 11월이면 크리스는 서른이 된다. 그가 그 나이가 되다니,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조리를 보자 나이를 먹을 때 시간이란 얼마나 빨리 흘러 가는 것인지 단단히 와 닿았다. 캐리가 알렉스와 사랑에 빠지다니 말이다. 사랑이 그녀의 눈을 반짝이게 했고, 작은 발이 집 안을 춤추듯 날아다니게 했다. 언니, 그사람 잘생겼지? 캐리가 물었고 나는 맞장구를 쳐주었다. 사실 나는 그가 평범하고 준수하게 생긴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캐리는 전화벨이 울리면 들떠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자기를 찾는 전화가 그토록 자주 울리자 흥분해서 비누 거품처럼 방울방울이 졌다. 그녀는 알렉스에게 열정적인 장편의 시를 쓰고, 나보고 읽어보라고 준 다음에 정작 읽어야 할 사람에게는 부치지 않고 모아두었다. 캐리는 알렉스와 결혼하면 어떠한 아이를 낳을지를 생각하며 행복한 고민을 했다. 언니, 내가 금발과 푸른 눈을 한 사내아이를 낳으면 누구 이름을 딸지 맞혀보라고 했다. 짐작씩이나 할 필요가 없었다. 캐리가 처음 낳을 아이, 금발이고 푸른 눈의 아들은 코리로 불릴 것이다.

 

사랑에 빠진 캐리를 지켜보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제 작은 몸 얘기를 그만두었고 심지어는 자기에게 사랑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도 내려놓고 있었다. 젊은 생에서 처음으로 그녀는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나 좀 봐, 언니! 어느 날 미용실에서 돌아온 그녀가 외쳤다. 새롭고 더 멋진 헤어스타일이었다. 나 이제 머리가 그렇게 커 보이지 않지? 그리고 얼마나 키가 커졌는지 보여?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무려 10센티미터짜리 굽이 달린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녀의 젊음, 사랑스러움, 기쁨에 너무도 뭉클한 나머지, 무

 

슨 일이 벌어져 그녀에게서 그 기쁨을 앗아 가면 어쩌나 하는 끔찍한 걱정이 들기도 했다.

나는 웃으면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나는 캐리가 행복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알렉스가 캐리에게 넋이 나가 있다는 건 보기만 해도 쉽게 알 수있었다. 그는 지역  가전제품 상점에서 여전히 전기기사로 일하면서 대학에서 여름 학기를 다니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남는 시간이면 마지막 1분까지도 캐리와 보냈다. 그가 캐리에게 이미 청혼

 

을 했거나, 청혼이 임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후에 문득 잠에서 깼는데, 캐리가 내 방 창문 앞에서 어두운 산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웬지 불안했다.

안자고 뭐해? 내 말에 그녀는 알렉스가 오늘 밤에 청혼했다고 말했다. 기쁜 일이었다. 정말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캐리의 표정은 저멀리 어둠에 덮인 산처럼 우울해보였다. 그녀는 그가 목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목사들은 완벽하기를 기대하기에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캐리는 할머니가 우리가 악마의 씨앗이고 죄악이

 

라고 말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언니, 왜 우리가 악하고 불경한 아이들이라고, 절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들이라고 할머니가 그렇게 말했을까? 언니, 정말 우리는 태어나도 마땅한 아이들이었을까?  알렉스는 완벽해, 그는 심지어 단 한 가지도 잘못한 적이 없어. 기분으로는 알렉스와 내가 오래오래, 아주 오래 알아왔던 것 같은데, 최근까지 그는 자기 얘기는 별로 하지 않았어. 나는 머리가 떨어져라 떠들어대는데 말이야. 하지만 우리 과거 얘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어. 부모님이 차 사고로 돌아

 

가신 다음에 폴 박사님이 우리 후견인이 됐다는 말만 했지.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잖아, 언니. 우린 고아가 아니야. 어머니가 여전히 살아 있잖아.  나는 목이 메었다. 주체할 수없이 겁이 나면서 목구멍을 치밀어 오르는 덩어리를 집어삼켰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알렉스는 항상 자기가 신과 종교에 이끌린다는 느낌을 가졌다고 했어. 어릴 적에는 가톨릭 신자가 되고 싶었다고 했어. 신부가 될 수 있게. 자라면서 신부는 독신으로 살면서 금욕해야 된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신부는 되지 않기로 마음먹었대. 하지만

 

그는 완벽할 걸 원해. 완벽한 신부를 원해. 난 완벽하지 않아. 난 악해. 할머니가 우리에게 항상 말했던 것처럼, 나도 사악하고 불경해. 그리고..엄마가 이복 삼촌하고 결혼했었단 얘기를 어떻게 해? 그는 나를 미워할 거야, 언니. 나처럼 기형아를 낳을 거라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난 정말 그를 사랑해. 나는 그녀가 앉은 의자옆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가 하듯이 꼭 껴안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크리스와 폴의 도움이, 무슨 말을 해도 항상 딱 맞게 하는 법을 아는 그들이 간절했다.

 

그리고 이 온갖 미친 생각을 다섯 살짜리 아이의 머릿속에 심어놓은 할머니를 향한 분노가 피를 끓어오르게 했다.

캐리.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들이 자기 자식들을 오직 남매끼리만 결혼시켰다는 거 알고 있니? 우리 부모님은 네 명의 아이를 낳았고 우리 모두 괴물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신은 우리 부모님도, 우리도 벌하지 않으신 거야. 그녀는 필사적으로 믿고 싶은 마음으로 내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언니, 어쩌면  하느님이 나는 벌주신 거잖아. 나는

 

크지 않아. 그게 벌이지. 참담했다. 어떻게 캐리를 이해시킬지.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고집스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언니는 나처럼 그를 알지 못해. 성인영화를 보러갔는데, 그가 그러는 거야. 저런 짓 중 그 어떤 짓이라도 하는 사람은 사악하고 도착증이 있다고 말이야. 언니하고 폴 아저씨는 섹스와 아기 만드는 일에 자연스럽고 삶의 아름다운 일부분이라고 했잖아. 난 나쁜 사람이야, 언니. 한번은 정말로 나쁜 짓을 했어. 나는 놀라서 물었다. 누구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니야...난 한 번도, 한 번도...섹스를 해본 적이 없어, 누구하고도. 하지만 다른 사악한 짓을 했어. 알렉스가 그렇다고 생각할 짓을 했어. 그게 나쁜 짓인 걸 알았어야 했는데. 뭘 했다는 거야? 무슨 나쁜짓을 했다는 거야? 말해봐! 그녀가 수치심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줄리언이었어. 어느 날 내가 뉴욕의 언니네 갔을 때 언니는 집에 없었고, 그는 뭘 하고 싶어 했어.....나하고 뭔가를 하고 싶어 했다고 재미있을 거라며, 섹스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했어. 그는 나한테 키스를 하고 언니 다음으로 나를

 

제일 사랑한다고 했어. 나는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거대하고도 아린 덩어리를 집어 삼켰다. 빌어먹을 줄리언...내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버려야 할 인간이었다.

캐리는 내 품에서 빠져나가 창 너머 어둠에 잠긴 먼 산들과 한밤의 흑해를 뚫고 항해하는 위로 기운 바이킹 배같은 반달을 바라보았다.

언니, 알렉스는 바뀌지 않을 사람이야. 그는 목사가 될 사람이야. 종교적인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악하다고 생각해.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전기기사가 되겠다

 

는 생각을 포기하겠다고 말했을 때, 우리 사이가 다 끝났다는 걸 난 알았어. 그는 지저분한 영화를 싫어하고 커풀이 나쁜 짓을 하고 있는 사진이 들어 있는 잡지를 싫어해. 그는 언니가 줄리언과 함께 추었던 것 같은 춤도 못마땅하게 여길 거라고 생각해.

한 늙은 여인이 그토록 여러 삶에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니, 우리를 폭스워스 홀에 데려간 엄마를 증오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그러면서

 

도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또 결혼해서 우리를 홀로 남겨두고 버렸고 자신은 여전히 화려하게 살고 우리는 여전히 고통받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몰락으로 끌어내릴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지는 그냥 알았다. 어쩌면 내가 그녀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캐리가 며칠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통 먹지를 못하고 넋을 놓은 듯 멍해 있었다. 그 왕성한 먹성이 다 어디로 간 건지 알 수없었다. 병원 가보자 했더니 생리통 때문이

라며 마다했다. 아, 그뿐이구나. 한 달에 한 번 오는 우울함. 하지만 일하면서도 수시로 전화로 캐리가 괜찮은지 확인했다. 그런 어느날 우리학원에 어떤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바트 윈슬로, 내 어머니의 남편! 내가 자기를 알아본 걸 보자마자 그가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보라색 타이즈를 입은 모습이 대단히 아름다워 보이시네요, 미

 

스 달.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바쁜데요! 내가 딱 잘라 말했다. 지금 일과중이니 끝날 때까지 저쪽에 앉아서 기다리세요. 그가 말했다. 미스 달, 당신을 찾느라 아주 고생을 했다고요. 그런데 그동안 내내, 바로 내 코 아래 있었더군요. 윈슬로씨. 제가 보내드린 수임료가 부족했다면 서신을 쓰시지 그랬어요.

그는 수임료 때문에 온 게 아니었다. 그가 재킷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내가 엄마에게 보냈던 많고 많은 편지중의 하나였다. 숨이 멎는 것 같았지만 냉정을 끝까지 유

 

지했다. 그 모든 소인과 반송 표시가 찍힌 편지는 내 어머니를 따라 온 유럽을 따라다닌 것이었다. 이 편지를 알아보시는군요. 그가 예리한 눈으로 내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며 말했다. 이봐요, 윈슬로씨, 제 여동생이 오늘 몸이 좋지 않아요. 그리고 아직 아기인 제 아들을 돌보고 있다고요. 여기도 바쁜거 보이시죠? 언제 다른 때 얘기하시면 안 될까요? 그는 편하실 대로 하라며 명함을 내밀었다. 되도록이면 빨리요. 물어볼 질문이 아주 많습니다. 그냥 넘어가려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그렇게 쏘고는 그는 갔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달려갔다. 캐리는 저녁을 준비하고, 조리는 놀이울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조리가 보이지 않았다. 캐리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기운없이, 속삭이듯이 조리가 옆집에 있고, 자신은 진짜 몸이 너무 좋지 않다고 말했다. 언니,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토를 했어. 배가 쥐어 짜듯이 너무 아파. 캐리의 머리에 손을 대보았더니 이상할 만큼 차가웠다. 다음 날 폴에게 전화를 했다. 캐리가 어디가 아픈지 병원에서 이미 여러 가지 검사를 했지만 뭐가 잘못됐는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는 얘기를 쏟

 

아냈다. 폴, 캐리 모습은 끔찍해요!  빠르게 몸무게가 줄고 있어요. 믿을 수없이 빠르게요! 구토를 하고 뭘 먹어도 소화를 못 시키고 설사도 해요. 당신과 크리스를 계속 찾고 있어요. 폴이 왔다. 그가 곧장 그녀를 품에 안고 질문을 했다. 잘못됐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신호가 무엇이니? 일주일쯤 전에 굉장히 피곤해지지 시작했어요. 언니한테는 말하지 않았어요. 저한테 무슨 일만 생기면 죽도록 걱정을 하니까. 그러고는 두통이 생기고 계속 졸음이 왔어요. 몸에 커다란 멍이 들어 있는데, 어디에서 생긴 건지 알 수

 

없었어요. 머리를 빗는데 머리카락이 아주아주 많이 빠졌고요. 그러고는 곧바로 구토를 하기 시작했어요.... 오빠를 봤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눈을 감고 잠들기 전에 웅얼거렸다. 폴은 이미 캐리의 차트를 보고 의사들과 얘기를 나눈 터였다. 그의 어두운 표정은 캐리가 어떤 상태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크리스를 불러....

 

크리스가 왔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캐리가 어디가 잘못된 거야? 그는 의사다. 모를리가 없었다. 오빠, 모르겠어? 정녕? 그 빌어먹을 비소잖아! 그거란 거 난 알아! 달리 뭐가 있을 수 있어? 일주일 전까지 멀쩡하다가 갑자기 아파졌어. 나는 울먹였다. 캐리가 오빠를 보고 싶어해. 그가 병실에 들어가기전에 그녀가 알렉스와 만난 날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를 그에게 건넸다. 크리스, 캐리는 뭔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걸 오랫동안 알고 있었는데도 자기 혼자만 품고 있었던 거야. 읽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 말해줘.

 

사랑하는 오빠에게...

어떨 때는 언니와 오빠 두 사람이 나의 진짜 부모님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그러고 나면 진짜 엄마와 아빠가 기억이 나. 엄마는 절대로 꿈이 아니었던 꿈처럼 느껴지고, 아빠는 사진이 없으면 머릿속에 모습을 그릴 수없어. 코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데 말이야. 숨겨온 일이 있어. 그러니까 이 글을 써두지 않으면 언

 

니 오빠가 자신을 탓할 것 같아. 오랫동안 나는 내가 곧 죽을 것이라고 느껴왔어. 그리고 이제는 예전에 그랬듯이 더는 아무것에도 신경이 쓰이지 않아. 난 목사의 아내가 될 수 없어. 언니 오빠 두 사람과 폴 박사님과 헤니가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렇게 오래 살지 못했을 거야. 이곳에 나를 붙잡아두는 네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오래전에 코리에게 갔을 거야. 나만 빼고 네 사람에게는 사랑할 특별한 사람이 전부 있었어. 나는 내가 영영 결혼하지 않을 거라는 걸 늘 알고 있었어. 아기를 가

 

질 수 있을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지. 엉덩이가 이렇게 좁아터졌으면서 말이야. 그리고 좋은 아내가 되기엔 나는 몸이 너무 작은 것 같아. 난 언니 오빠처럼 특별한 사람은 절대 되지 못할 거야. 언니, 춤을 추고 아이를 갖고 다른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언니처럼 말이야. 오빠처럼 의사도 될 수 없어. 그러니까 난 그저 걸림돌이나 되고 모든 사람을 걱정시키는 존재일뿐이야.....지난주부터 할머니와 할머니가 하던 말이 생각나기 시작했어. 우리가 악마의 씨앗이라고 항상 말했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녀가 옳았다는 걸 알게 되었어.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나는 유해한 사람이야. 할머니가 우리에게 준 가루 설탕을 뿌린 도넛에 들어 있던 비소때문에 코리가 죽었을 때, 나도 죽었어야 했어. 내가 아는 줄도 몰랐지? 언니 오빠는 내가 저 구석 바닥에 앉아 있는 내내 듣지도 , 알아채지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도 보고 들을 줄 알아. 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던 거야. 이제 나는 믿어. 고마웠어, 언니, 내 엄마가 되어주고 이 세상 살아 있는 최고의 언니가 되어주어서. 오빠도 고마워. 아버지 대신 아

 

버지 노릇을 해주고, 나에게 두 번째로 최고인 형제가 되어주어서. 그리고 폴 아저씨께도 감사드려요. 내가 크지 않는데도 저를 사랑해주셨어요. 세사람 다 나와 함께 사람들 앞에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헤니에게 내가 사랑한다고 전해줘. 난 내가 키가 크지 않으면 하느님도 나를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렉스가 해준 말이 있어. 하느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고. 좀 작은 사람도 말이야.

 

그녀는 제 작은 몸집을 메우려는 듯 편지에 엄청나게 커다란 서명을 휘갈겨 썼다. 아...하느님! 크리스가 외쳤다. 캐시,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그제서야 나느 핸드백을 열고 캐리가 자기 방 벽장 어둡고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것을 꺼냈다.. 쥐약 병과 하나밖에 남지 않은 설탕 친 도넛이 든 봉투를 꺼냈다. 크리스의 뺨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본격적으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 하느님....도넛에다 비소를 바른거야? 그래서 코리가 간 것처럼 똑같이 가려고?

 

나는 내 몸에서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조여드는 그의 팔을 떼어내 몇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크리스! 그 편지 다시 읽어봐! 캐리가 뭘 썼는지, 뭘 믿지 못했는지, 그런데 지금은 믿는다고 쓴거 안 보여? 왜 그때는 믿지 않았는데 지금은 믿을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잖아! 우리 어머니가 우리에게 독약을 먹였다고 그녀가 믿을 만한 일이 생겼다는 말이야!(이후에 캐리가 캐시에게 한 말중에 나옴-캐리가 길거리에서 엄마를 만났는데 엄마가 모른척 한거, 캐리는 엄마가 자신을 외면하는 걸 보고 믿지 않았던 비소도넛을 믿게 되었다. 캐시입장에서는 사랑에 빠진 캐리를 죽인건 결국 캐리를 외면한 엄마 코린이었던 것이다)

 

폴이 병실에서 나왔다. 그의 핼쑥한 얼굴에 드러난 침통한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크리스에게 다시보니 반갑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게되어 유감이라고 했다. 크리스가 물었다. 폴. 희망이 있죠? 희망은 언제나 있지. 손쓸 수 있는 일을  모두 해보고 있다. 캐시하고 나는 캐리가 맞서 싸우고 살아갈 의지를 되살릴 만한 온갖 말을 다 쥐어짜냈어. 하지만 캐리는 포기했어. 알렉스가 병상 옆에 무릎을 꿇고서 캐리를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만 캐리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지. 지금

 

캐리는 무슨 말이 들리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어디 손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린 듯이.

캐리의 병실로 들어갔다. 여전히 여름인데도 그녀는 두터운 이불 더미 아래 막대기처럼 말라서 누워 있었다. 그토록 빨리 나이가 들어 보일 수가 있다니, 그저 어떻게 그런일이 가능한지 믿기지가 않았다. 단단하고 무르익고 장밋빛을 띤 어린 젓살이 다 날아가고, 작은 얼굴이 수척하고 푹 내려앉았다. 눈도 푹 꺼져서 광대뼈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크리스가 그런 그녀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가 몸을 숙여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이름을 되풀이해 부르며 그녀의 긴 머리를 쓸어내렸다. 쓸어내리는데 머릿카락이 잔뜩 빠지는 바람에 또 그가 또 경악을 했다.

내 이웃이 조리를 봐주고 있는 동안에 우리 셋 다 사흘 낮 사흘 밤을 캐리의 곁에 머물렀다. 모두 그녀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헤니에게 전화를 걸어 교회에 가서 그

 

녀의 가족들과 신도들도 캐리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수화기를 톡톡 두드리며 그래, 그래라고 신호를 보냈다.

꽃이 캐리의 병실을 매일 채웠다. 나는 누가 보냈는지 보지도 않았다. 크리스나 폴 옆에, 혹은 둘 사이에 앉아서 그들의 손을 잡고 조용히 기도했다. 나는 알렉스를 불편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캐리가 잘못된 데 그가 많은 책임을 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더 이상은 속으로만 의문을 담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알렉스를

 

따라가 그를 구석에 몰아넣었다.

알렉스, 캐리가 평생 가장 행복했던 나날에 왜 죽으려는 생각을 했을까? 내 동생이 당신에게 뭐라고 했고 당신은 그 애에게 또 뭐라고 했죠?

그가 넋이 나가고 비탄에 찌든 얼굴을 내게 돌렸다. 면도도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제가 무슨 말을 했느냐고요? 캐시, 제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걸 확신시키려 있는 힘을 다

 

한다는 건 하느님이 아세요! 하지만 캐리는 제 말을 들으려 하지를 않아요.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요. 결혼해달라고 했고, 그녀가 승낙했어요. 내 목을 끌어안고 하겠다고, 하겠다고. 말하고 또 말했다고요. 그러더니 아, 알렉스, 난 당신에게 부족해도 너무 부족한 사람이에요.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그녀에게 당신은 완벽한 사람이라고, 내가 원하던 그대로라고 말해줬어요. 내가 어디서 잘못한 걸까요. 캐시?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그녀가 제게 등을 돌리고 쳐다도 안 보려

 

고 하는 걸까요?

알렉스는 오로지 대리석으로 깎은 성자상에서만 보이는 다정하고 경건한, 그런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 서 있는 그는  가진 힘이 너무도 없다는 듯이 비탄에 초토화되고, 자신에게서 등 돌린 사랑에 갈가리 찢긴 모습이었다. 나는 팔을 뻗어 최선을 다해 그를 달랬다. 그는 정말로 캐시를 사랑했다. 알렉스, 미안해. 내가 좀 독하게

 

말했지? 용서해줘요. 하지만 캐리가 뭐 고백한 거라도 있어요? 그의 얼굴에 다시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일주일 전에....그녀가, 캐시, 전 그녀를 사랑해요! 그녀가 자기는 몸이 너무 작고 머리는 너무 크다고 말했지만 제 눈에는 그녀의 비율이 아무렇지도 않게 딱 맞아 보여요. 저에게 그녀는 자기가 아름다운지도 모르는 앙증맞은 인형이에요. 그리고 만약 신이 그녀를 죽게 내버려둔다면, 이 삶에서는 다시는 신앙을 갖지 않겠어요! 그러고는 그가 손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다.

 

크리스가 도착하고 나흘째 밤이었다. 나는 캐리 옆에서 졸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 마저 병이 나기 전에 토막 잠을 청하고, 알렉스도 복도에 놓인 간이침대에서 잠을 청해보려 하고 있었다. 그때 캐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침대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이불 아래 손을 집어넣어 그녀의 작은 손을 잡았다. 손은 이제 뼈밖에 남지 않아서 정맥과 동맥이 다 보일 정도로 투명했다.

 

그녀가 소곤거렸다. 언니하고만 얘기하고 싶어, 나는 죽을 거야, 언니. 대수로운 문제도 아니라는 듯, 이미 죽음을 받아들이고 기쁜 듯이 너무도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니야! 나는 세차게 부정했다. 넌, 죽지 않아! 네가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거야. 난 널 친자식처럼  사랑해. 많은 사람이 너를 사랑하고 널 필요로 하고 있어, 캐리! 알렉스는 너를 정말로 사랑하고 너와 결혼하고 싶어 해. 그리고 이제 목사가 되지 않을 거래, 캐리, 내가 그에게 그가 목사가 되는 걸 네가 불편해한다고 말했어. 그는 네가 계속 살

 

고 자기를 사랑해주는한, 직업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어. 네가 작든, 아기를 가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어. 내가 불러다줄게. 그가 직접 너한테 전부 말 할 수 있게....

안돼. 그녀가 가늘게 말했다. 언니한테 말할 비밀이 있어. 캐리의 목소리가 어찌나 희미한지, 저 멀리에 있는 부드럽고 둥근 작은 언덕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길에서 어떤 여자분을 만났어.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귀를 가져다 대야 했다. 엄마랑 너무나 비슷하게 생겨서 달려갈 수밖에 없었어. 따라잡아 그녀의 손을 잡았어. 그녀가 손을 확 빼내더니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봤어. '난 당신 누군지 몰라요.' 하고 여자가 말했어. 언니, 우리 어머니였어. 아주 조금만 나이를  더 먹어 보였을 뿐이고 예전과 거의 똑같았어. 그녀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비 모양 다이아몬드 죔쇠가 달린 진주목걸이까지 하고 있었어. 그런데 언니, 친엄마도 원하지 않으면, 이 세상 그 누구도 나

 

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 아닐까? 엄마는 나를 봤고 내가 누군지 알아봤어. 눈 안에 다 보였어. 그런데도 엄마는 나를 원하지 않았어. 내가 악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그게 바로 엄마가 그 말을 한 이유야. 아이가 한 명도 없다고 한 말 말이야.. 그녀는 언니나 오빠도 원하지 않아. 세상 모든 어머니는 자식들이 사악하고 불경하지 않는 이상 그들을 사랑하고 원해. 우리처럼 사악하고 불경한 아이들만 아니라면.

 

캐리! 그녀가 너를 부정한 건 돈을 사랑했기 때문이야....네가 나쁜 사람이거나 사악하거나 불경해서가 아니란 얘기야. 넌 악한 짓 아무것도 한 거 없어! 그 여자한테는 돈이 문제지, 우리가 중요한 게 아니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녀 따위 필요 없어. 캐리, 제발 우리 가슴을 무너뜨리지 마, 의사들이 너를 도와주는 동안에 있는 힘껏 버티고 있어야 해. 포기하지 마. 조리가 이모를 돌려받고 싶어 해. 매일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 그 애에게 뭐라고 말해줄까? 네가 안 살아도 그만이라고 한다고 말해줘?

 

언니...조리에겐 나 필요 없어. 조리에겐 나 말고도 사랑해주고 보살펴줄 사람이 아주아주 많아...하지만 코리, 코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언니. 지금 바로 그가 보여. 봐봐, 언니 어깨뒤에, 아빠 옆에 서 있잖아.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나를 원하고 있어.

캐시! 그러지마!

 

내가 가는 곳 근사하다. 언니, 꽃이 천지고, 아름다운 새들도 있어, 그리고 내가 자라는 게 느껴져....안 보여? 내가 늘 원했던 대로, 거기의 엄마만큼 키가 커. 그리고 그곳에 가면 내가 부엉이처럼 크고 무서운 눈을 가졌다고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야. 아무도 다시는 내게 난장이라고 말하지 않고, 나더러 몸 늘여주는 기계를 써보라고 말하지 않을 거야...왜냐하면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키가 클테니까.

 

그녀의 약하고 떨리는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눈동자가 천국을 향해 굴러가며, 깜빡이지도 않고 떠 있었다. 말할 게 더 남아 있다는 듯 입술도 여전히 벌어져 있었다.

이런, 세상에.... 그녀가 죽었다. 그때 나는 비명을 질렀다. 내가 비명을 지르고 있는게 느껴졌다. 나는 울부짓었고, 내 머리통에서 머리카락을 뽑아버리고, 얼굴에서 살을 뜯어내고 싶었다.. 댓가를 치러야 할 그 여자와 나는 너무 비슷하게 생겼다. 그녀는 댓가를 치르고, 또 치르고, 치르고, 그러고 나서도 조금 더 치러야 했다!

 

무더운 8월의 어느 날, 우리는 폴 세필드 가족 묘지에 캐리를 묻었다. 클레어몬트 시 경계선에서 바깥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묘지였다. 이번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땅에 눈도 없었다. 이제 죽음은 겨울에만 빼고 다 찾아왔다.(훗날 눈덮인 겨울에 캐시와 크리스가 죽는다) 나에게 들어와 환희에 젖으라고 초대하는 차갑고 세찬 바람이 부는 겨울만 남았다. 우리는 캐리를 위해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던 진홍과 보라색 꽃들로 덮어주었다. 머리 위로 뜬 태양이 풍성하게 샛노란 색을 띠다 못해 오렌지

 

색에 가까워지더니, 지평선으로 내려가는 동안 짙은 주황색으로 변하고 장밋빛 붉은색으로 천국을 물들였다. 나의 생각은 세차게 몰아치는 증오의 바람 속에 휘날리는 메마른 나뭇잎 같았다. 나는 딱딱하고 불편한 대리석 벤치에 앉아서  떠날 줄 모르고 증오만을 생각했다. 그 메마른 나뭇잎들을 한데 모아 엮어서 마법의 지팡이로, 복수의 물을 휘저을 것으로 만들어냈다.

 

네 개의 드레스덴 인형 중에 이제 둘만 남았다. 인형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생명을 보존하고 계속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서약한 의사였다. 심지어 살 자격이 없는 사람조차 살리기로 선서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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