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런갱어 시리즈 2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2
영국왕립발레단과 리허설을 하며 순조롭게 공연 준비를 해 나갔다. 마담 졸타는 이번 런던 공연을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데 있어서 더할 나위 없는 기회로 삼고 싶어하는 것으로 그녀의 들뜬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우리 모두를 사랑한다. 나를 자랑스럽게 만들어줘 라며 울먹일 정도였다. 나를 여기까지 올 수있게 만든 데에는 졸타의 영향도 컸기에 나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런던의 오페라 하우스는 웅장하고 위엄이 있었다. 공연장은 수 천명을 수용할 수있을 정도로 규모가 메머드급이었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곳은 슬럼가의 낡은 판잣집 같았다. 연습실 조차 없었다. 난방과 수도 시설이 엉망 그 자체였다. 온수도 조금 나왔고 춤을 추지 않을 때에는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줄리언은 하루 종일 내옆에 본드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욕실에 들어 갈때도 따라 들어올 정도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까지 들어올려고 했다. 나의 인생에 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
다.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그래서 폴 세필드 박사가 양 부가 되어 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싶어하는 건 따로 있었다. 폴과 어디까지 간거냐고 물었다. 어리고 아름다운 소녀에게서 탐스러운 젖 꼭지를 보았겠고 그래서 후하게 군 거야. 캐시, 그 사람 하고 어디까지 갔냐고! 내가 말했다. 난 그 사람을 사랑했고 결혼 할 생각까지 했다고, 우린 또 한 바탕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가며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치 조울증 환자 같았다. 그렇게 싸우다가도 꼬리를 내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해, 나를 사랑하려고 애써줘서 고마워라며 애걸했다. 이 광적인 남자, 컨추럴 하기란 애초에 글러먹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히고 있었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냈지만 뉴욕에 돌아갈 일이 무시무시하게 두려웠다.
뉴욕으로 돌아오고 봄이 시작될 무렵에 줄리언과 함께 폴의 집으로 갔다. 졸고있는 폴 옆에서 캐리가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었다. 폴은 나와 사랑을 나누던 자신의 방을 아
름답게 꾸며놓았다. 다리에 힘이 쫙 풀렸다. 폴은 내 표정에서, 그리고 데리고 온 줄리언을 보면서 일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걸 깨닫고 있었다.
가정부 헤니는 선물로 갖고온 순금 팔찌를 받아들고 환한 미소를 지었지만 캐리는 루비와 자수정이 박힌 팔찌를 본 척 만 척했다. 자신이 의지하는 폴과 내가 육체적인 관계는 몰라도 연인처럼 가깝게 지낸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캐리였기에 줄리언의 등장은 못마땅 할 수밖에 없었다.
폴은 다른 남자를 데리고 왔으니 설명이 필요할 거라고 했다. 나는 그의 누나 아만다가 뉴욕에 왔었다는 얘기를 했다. 살아있는 아내를 없는 것으로 하고 나를 정부로 만들려 했다고 쏘아 붙였다. 폴은, 너와 내가 연인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당시 너희들이 우리 집에 왔을 때에는 넌 막내 코리를 잃고 비통함에 빠져있는 그저 겁많은 아이일 뿐이었어. 넌 늘 내 마음을 짠하게 건드렸지, 이제 넌 비난하는 눈길로 또 내 마음을 건드리고 있어. 하지만 네가 옳아, 너에게 얘기해야 했어. 그녀가 스코티와 함
께 물에 뛰어 들었다고 했을때 줄리아가 살아 남았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어, 내 잘못이야. 의사들이 의식불명 상태인 그녀를 깨우려고 했지만 허사였어. 그녀는 끝내 깨어나지 않았어. 너희들이 여기 오기 전에는 매일 차를 타고 가서 사설 병원에 있는 그녀를 방문했어. 침대곁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여윈 얼굴과 해골같은 몸을 힘겹게 바라봤어. 하지만 이제 그녀는 세상에 없어. 줄리아의 고통은 끝났어. 우리 둘이 연인이 되던 해에 그녀는 세상을 떠났어. 우리가 시작하고 한 달이 채 못 됐을 때야.
그때 네가 뭔가 잘못 됐다는 걸 느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게 기억이 나. 그가 흐르는 내 눈물을 닦았다. 나의 선택은 이래서 최악이었던 것이다. 그를 의심했고 나는 줄리언에게로 갔다. 아만다가 뉴욕에 쳐들어 왔을때에는 이미 줄리아는 이 세상에 없었다. 그녀는 동생의 아내가 버젓이 살아 있다고 했었다. 난 그녀에게 속은 것이었다.
아만다는 당시 내가 폴의 아이를 가져서 낙태수술까지 했다는 말까지 내게 했었다. 병원에 가서 진찰 받고 수술대위에 누운적이 있긴 있었다.
나는 폴에게 물었다. 당시 낙태 수술이었어요? 아니면 소파 수술이었어요? 난 그때 아무것도 몰랐고 왜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았죠? 내 말에 폴은 유산으로 인한 소파수술이었다. 누굴 믿던 너의 선택에 달렸다고 했다. 당시 그의 아내가 살아 있었고 그가 나의 임신을 바라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당시로 돌아가서 난들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아이를 낳을 수 있었겠는가. 자문해 보면 자신이 없었다.
폴이 짐을 챙겼다. 여행 가방에 거칠게 옷을 쑤셔 넣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당신 집인데 어딜 가냐고, 폴이 떠날 이유가 없다고, 제가 떠날게요. 캐리도 제가 데리고 갈게요. 그래야 다시는 제 얼굴을 보실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그는 화를 벌컥냈다. 내 아내인 너를 나로부터 떼어 놓더니 이젠 내 딸인 캐리마져 데려갈거냐며, 내 혈육과도 같은 캐리는 남겨두라고 말했다. 내 것으로 뭘 좀 남겨줘야 하지 않겠냐구. 그리고 그는 떠나는게 아니라 줄리언의 아버지가 위독하다고 했다. 내 침대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데 헤니가 들어왔다. 폭스워스 가를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이곳에 왔을때 우리를 폴의 집으로 인도한 헤니,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내등을 토닥거렸다. 그리고 앞치마 주머니에서 오려놓은 지역 신문을 꺼냈다. 내가 줄리언과 결혼했다는 발표였다. 헤니, 내가 울부짓었다. 난 어떻게 해요? 줄리언과 결혼했고, 이혼하자고 요구할 수도 없어요. 말을 못하는 언어 장애인인 그녀는 수화로 빠르게 말했다. 그 누나란 사람은 언제나 골칫덩어리였어. 한 남자가 이미 상처를 입었는데 두 사람이나 상처 입힐 필요
는 없지.폴은 좋은 사람, 강한 사람이야. 그는 실망을 극복하겠지만 춤추는 저 젊은 남자는 아마 극복하지 못할 거야. 눈물을 훔쳐내고 더 이상 울지 말고 환하게 미소를 지어. 거실에 있는 줄리언에게 아버지가 위독하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의 놀라는 표정은 좀 의외였다.
폴은 우리를 병원에 태워다 주면서 괜히 호텔에 갈 생각말고 여기 원하는 만큼 있다가 가도 된다고 했다. 자신은 며칠내로 돌아온다고 했다.
병원에서 마담 마리샤와 그의 아들 줄리언이 고함을 지르며 싸워댔다. 이 무정한 놈 전보를 친지가 언젠데 이제 나타났느냐. 줄리언은 공연 핑계를 댔고 아버지가 오직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날 평생 춤만 추게 한 거 외에 뭐가 있느냐며 어머니를 몰아세웠다. 신혼여행중에 그의 아버지는 죽었고 우리는 신혼여행 옷차림 그대로 장례에 참석했다.
부활절 방학을 맞아 집에 온 크리스가 쏘아붙였다. 줄리언과의 결혼이 그것이었다. 니 선택이 그거 였다면 차라리 폴이 백배는 나았을 거라고 한다. 그 조차 줄리언이 어떤사람인지, 반려자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폴과 줄리언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면, 폴이어야 했어! 우리를 받아주고 먹여주고 입혀주신 분이고, 우리에게 뭐든 최고로 해주신 분이야. 난 줄리언이 싫어. 그놈은 널 파멸시킬거야! 그는 항상 옳았고 내 선택은 항상 최악이었다. 인정했다.
뉴욕으로 떠나기 몇 시간 전에 캐리를 설득했다. 언니와 뉴욕에 가서 살지 않겠냐고, 하지만 캐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입 닥쳐! 이제 난 언니를 좋아하지 않아! 가버려! 넘어져! 죽을 때까지 춤이나 춰!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하는 그 말들 때문에 말할 수없이 가슴이 아팠다. 나의 캐리, 내가 그녀 인생 대부분에서 엄마 같은 존재였는데 그런 캐리가 내게 가버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옅은 분홍색의 아름다운 장미들 앞에 서 있는 크리스가 보였다. 어
깨가 축 처져 있었고 그 푸른눈.....그 눈은 언제까지나 나를 따라다닐 것이었다. 그의 사랑에 나는 그 누구와도 주저 없이 사랑에 빠지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리라.
줄리언과 뉴욕에 돌아와서 딱 마음에 드는 아늑한 아파트를 찾아 입주를 했다. 줄리언과 내가 발레 세계의 정상에 올라서려고 노예처럼 노력하는 동안에 크리스도 속성으로 의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가 뉴욕에 왔을때에는 줄리언 몰래 서로 손잡고 센트럴 파크를 걸어 다녔다. 줄리언은 크리스를 끔찍히도 싫어했다. 거의 편집광적이었다.
틈만 나면 크리스와 폴을 헐 뜯거나 나를 집착적으로 소유하고 싶어했다. 그는 끊임없이 애지중지해야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날 저녁에 크리스를 우리집에서 잠을 자게 하려고 데려왔는데 역시나 줄리언이 가만있지 않았다. 당신이 왜 내 집에서 자야하는데! 할 수없이 크리스는 호텔로 향했다. 크리스는 그 후 3년 동안 다시는 뉴욕에 오지 않았다. 캐리는 열다섯 살이 된 그해 여름에 뉴욕에 왔다. 처음으로 혼자 오래 비행기를 타고 와서 그런지 망설이고 겁에 질린
얼굴로 그녀는 공항에 나타났다.
자신이 증오하던 줄리언이 반기는 호들갑에 캐리는 기뻐했다. 캐리를 보자 다시 코리 생각이 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코리도 살아 있었다면 이 나이에 키가 137밖에 안 되었을까? 가슴이 먹먹했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줄리언과 내가 결혼한지 5년이 넘었다. 그사이 크리스는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편지에는 부끄럽지만 2백 명의 급우 가운데 수석 졸업생이 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졸업 축사를 자신이 하는데 내가 반드시 와야 한다고 못 박았다.
크리스의 졸업식 참석은 또 한 번 내 인생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5월에 공연이 하나 있었다. 근데 크리스의 졸업도 5월이었다. 하지만 졸업식에 참석하고도 공연은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줄리언은 연습 시간이 부족하다며 반대를 했다. 크리스이기에 반대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일로 또 크게 싸웠다. 난 그가 잠자는 틈을 타 그가 숨긴 여권을 찾아내어 노스케롤라이나로 갔다. 폴과 캐리가 공항에 마중 나왔다. 폴을 본 것은 3년 만이었다. 우리는 가볍게 포옹을 했다.
크리스의 졸업식장. 크리스가 통로를 성큼성큼 걸어가 계단을 오르고 졸업장을 받고 고별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내 가슴속에는 행복이 부풀
어 올랐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고별사에 또 눈물이 흘러 넘쳤다. 폴과 헤니와 캐리도 눈물을 흘렸다. 내가 무대에서 거둔 성공도 지금 느껴지는 자부심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엄마 생각이 났다. 그녀도 이곳에 와서 크리스가 졸업하는 모습을 지켜 보아야 마땅했다. 나는 그녀가 지금 런던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직도 세계 어디를 가든지 그녀의 움직임을 쫒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따라잡을까 봐 두려워했다. 한 없이 두려워했다. 줄리언과 내가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 그녀도 스페인에
있었다. 여러 신문에 나온 뉴스였고, 얼마 안 가서 스페인 신문에도 바살러뮤 윈슬로 여사의 아름다운 얼굴이 실렸다. 있는 힘을 다해 런던으로 비행기를 타러 가던 중에 찍힌 사진이었다. 졸업식 후 폴이 헤니와 캐리를 데리고 영화를 보러갔고 나는 크리스와 캠퍼스를 거닐었다. 그는 자기의 기숙사 방을 손으로 가리켰고 스터디 그룹을 만든 얘기도 했다. 내가 물었다. 데이트 많이 했냐고. 공부하는 일정이 빡빡해서 주중에 사교생활을 한다는건 꿈도 못 꿨다고 했다. 공부말고 내가 듣고 싶은 얘기를 들려달
라고 했다. 누구랑 사귀었고 지금 사귀는 여자 있느냐고 물었다. 그가 말했다. 네가 알고 싶은 게 그거라면....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어. 평생 알아온 여자야. 밤에 잠이 들면 그녀 꿈을 꿔. 그녀는 내 머리 위에서 춤을 추고 내 이름을 부르고 내 볼에 입을 맞추지. 악몽을 꾸면 비명을 지르고, 나는 깨어나서 그녀 머리에 묻은 타르를 떼어내. 그녀가 처음부터 다시 줄곧 아파하면 나도 깨어나 처음부터 다시 줄곧 아파하고, 눈물 자국에 입을 맞추는 꿈을 꿔...그리고 그녀와 내가 차가운 슬레이트 지붕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 보던 어느 날 밤의 꿈을 꿔. 달이 우리라는 존재를 힐난하며 내려다보는 하느님의 눈 같다고 그녀는 말했지. 그러니까 캐시, 나를 사로잡아서 떨어지지 않고, 나를 지배하고 좌절로 가득 채우는 여자가 있어. 그녀가 세워버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다른 모든 여자와 보내는 시간을 어둡게 만들어 버리는 여자. 그리고 하느님께 바라옵기를, 네가 지금 만족스럽다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야릇한 표정으로 웃더니 재빨리 나를 떼어 놓으며 말했다. 캐시, 아무말도 하지마,이건 내문제야. 누가 이래
라저래라 할 문제가 아냐.
폴의 집에 머물면서 줄리언이 어떤 상태인지를 가늠해보았다. 폴과 크리스에게서 온 편지를 마음대로 열어 읽으면서 나를 짜증나게 했던 줄리언의 그 온갖 비열하고 악랄한 짓, 스페인에서 돌아온 그가 나를 벌주는 방편으로 화초를 일부러 죽게 내버려둘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운 어느날, 크리스가
집안에서 나와 석간신문을 건넸다. 보여주지 않을까 하다가 맘을 바꿨어. '부부 발레팀인 줄리언 마르케와 케서린 달(캐시), 우리 지역 출신의 이 유명 인사들이 갈라선 것으로 보인다. 줄리언 마르케는 처음으로 아내가 아닌 다른 발레리나와 파트너로 호흡을 맞춘다. 케서린 달이 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한동안 돌았으나....'
욜란다 랭이 내 자리를 대신한다는 사실까지 소식은 더 있었다. 그 많던 기회중에 하필이면 우리가 스타가 될 큰 기회였다. 그런데 그는 내 자리에 욜란다를 앉혔다! 빌어먹
을 놈! 왜 철이 들지 못하는 걸까? 그는 우리 손에 들어온 기회마져 날려버렸다. 욜란다는 키가 크고 체중이 많이 나가서 편하게 들어 올리지도 못하는 그였다. 그 좋지 않은 허리로 어림도 없었다. 친 오빠 졸업식에 참석한게 못마땅해서 이따위짓을 하다니....어제 부인과에 비밀스럽게 다녀왔는데 모든 일이 엉망이되고 있었다. 월경 주기가 불규칙해서 임신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혹시 임신이라고 해도 낙태를 견딜수 있는 힘을 갖게 되기를 기도했다. 내 인생에 아이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최고 발레리나의 꿈을 접어야 한다.
뉴욕으로 가던날 크리스가 그 미친 작자에게 돌아가게 놔두지 않겠다며 따라 붙겠다고 했다. 캐리는 늘 그랬듯이 눈물을 흘렸고, 폴은 뒤로 물러서서 나와 말없는 눈빛으로 교감을 나눴다. 폴의 눈빛은 자신의 가슴에 나를 위한 자리를 다시 마련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크리스와 뉴욕으로 향했다. 비행기가 뉴욕 라가디아 공항에 도착했다. 우
린 극장으로 갔다. 줄리언이 솔로를 마치기가 무섭게 욜란다 랭이 피루엣을 하며 등장했다. 하지만 둘은 어딘가 호흡이 맞지 않았다. 욜란다는 볼품없어 보이고 줄리언은 기술이 떨어져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감독이 컷!을 외쳤다. 감독이 줄리언을 질책하는 소리가 내 귀에 다 들렸다. 줄리언은 욜란다 탓을 했다. 감독이 빈정거렸다. 언제나 여자 무용수 탓이고 네 탓은 절대없지? 자네 아내는 언제쯤이면 몸이 나아서 춤을 다시 출 수 있지? 그러자 욜란다가 소리를 질렀다. 전 로스엔젤레스부터 그 먼 길을 왔어
요. 그런데 캐시로 절 대신한다구요? 그렇게는 못해요! 이제 계약서도 썼어요! 고소할 거라고요! 감독이 말했다. 욜란다, 자넨 임시 대역일 뿐이야. 좋아, 역할을 맡고 있는 동안에 다시 한 번 시도해 보자. 그들은 다시 시도했지만 나아지지는 않았다. 객석 맨 앞줄에 앉아있던 마담 졸타가 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구세주를 만난양 내쪽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나보고 빨리 무대위로 올라가라고 했다. 저 악마같은 놈이 무대를 망치고 있어. 빨리 올라가라고했다. 마담에게 물었다. 저 대신 욜란다를 세운 사람이 누구
예요? 네 남편이다. 넌 저놈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뒀지? 그 점에서 넌 바보야! 저놈은 구제불능이고! 얼른 의상입고 나를 지옥에서 좀 구해다오! 크리스는 줄리언이 나한테 무슨 해코지를 할까봐 걱정을 했다. 나는 쏜살같이 연습용 옷으로 갈아입고 발레리나로 온 몸을 세팅하고 재빨리 몸을 풀었다. 그런 후 무대 옆쪽에서 머뭇거렸다. 크리스 말대로 막상 줄리언이 나를 보고 어떻게 나올까 걱정이 되었다. 그때 누가 뒤에서 나를 밀쳤다. 욜란다 였다. 넌 잘렸어! 그러니까 나가, 꺼지라고! 이젠 줄리언은 내 거
야! 내거라고! 난 네 침대에서 잤고, 네 화장품을 쓰고 네 보석을 찼어. 알았어!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그녀가 한 말을 한 마디도 믿고 싶지 않았다. 지젤을 추라는 큐 사인이 나자 욜란다가 나를 붙들려고 했다. 내가 사납게 몸을 돌려 그녀를 밀었고 그녀가 나가 떨어졌다. 푸앵트로 미끄러지듯 무대를 가르며 한 스텝 한 스텝을 아주 정확한 거리로 옮겨놓았다.
안녕?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차갑게 내뱉었다. 하지만 그는 한 동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와 호흡을 맞췄다. 완벽했다. 하지만 그가 속삭였다. 소름끼치게, 넌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내 인생에서 꺼져! 이건 마지막 선물이야. 그가 내 허리에서 손을 떼더니 높이 솟아 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떨어지면서 내 두 발을 짓밣았다. 그의 체중이 그대로 실린 그의 발이 내 발위로 떨어졌다. 나는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며 그자리에 쓰러졌다. 감독이 뛰어 나왔지만 너무 늦었다. 그는 사라졌고 크리스가 무대위로 뛰어올
라왔다. 그걸로 나의 현역 발레 인생은 끝이었다. 엑스레이결과 양쪽 발가락 네 개가 골절이 되었다. 다행이라면 양쪽 엄지발가락 둘은 살아 남았다는 것이다.
수술받고 크리스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니 집안이 난장판이었다. 아수라장이었다. 그가 한 짓이 분명해 보였다. 발가락 통증으로 잠들지를 못하고 끙끙거리는데 한 밤중에 전화가 왔다. 병원이라고 했다. 나는 미친 듯이 크리스를 찾았다. 크리스와 병원에 도착했다. 교통사고였다. 줄리언은 척추골절 중상이었고 동승했던 욜란다는 차
밖으로 튕겨 나가서 즉사했다. 며칠이 지나 줄리언의 의식이 돌아왔다. 그는 나를 보자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몰골을 확인했는지 이런 꼴을 하느니 죽는 편이 낫다고 했다. 그러면서 알량한 동정심은 바라지 않으니 당장 꺼지라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핸드백을 집었다. 우리 아파트를 난장판으로 만들다니, 이 나쁜놈! 나는 그가 말을 할 수 있을때 몰아붙였다. 내 옷도 다 찢어놓고! 너무나 화가나서 그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네 물건 그 꼴로 만들어 놓은 건 욜
란다야. 내가 지켜보기는 했지만, 그날 밤에 옆방에서 자고 병실로 갔다. 줄리언이 호흡을 하지 않았다. 크리스가 살펴보더니 숨이 멎었다고 했다. 팔에 꽂힌 주사바늘 튜브가 잘려 있었다. 줄리언의 오른손에 가위가 들려 있었다. 졸고 있던 간호사가 떨어뜨린 가위였다. 그는 아버지 곁에 묻혔고 나는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
나는 내 안에서 아이가 자라가는 사이에 내가 잃었던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다. 이제 화려한 삶에 대한 환상을 뒤로하고 땅에 굳게 다리를 딛고 서있었다. 큰 미련은 없다.
내 어머니에게, 그녀가 했던 짓으로 생각을 돌리면 그만이었다. 또 하나의 죽음이 당신의 기록에 남았어요. 엄마!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윈슬로 여사님, 아직도 저에게서 도망을 다니시나요? 아주 빨리, 아주 멀리 도망쳐도 영영 도망가진 못한다는 거 아직도 모르시나요? 언젠가 제가 당신에게 달라붙을 거고 우리는 다시 만날 거예요. 이번에는 당신이 제게 주었던 것 만큼의 고통을 당신도 겪게 될 거예요. 바라건데 세 배쯤은 더 고통 받았으면 좋겠어요. 제 남편이 교통 사고로 죽었어요. 당신의
남편이 아주 오래전에 죽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말이예요. 그의 아이를 가졌지만, 저는 당신이 했던 만큼 절박한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설령 세쌍둥이나 네쌍둥이를 가졌다고 해도 말이예요. 나중에 신문보고 알았는데 이편지를 부쳤을때에 그녀는 일본에 가있었다.
모든게 한 바탕의 꿈 같았다. 내 인생이....
2월의 어느 추운 밤에 첫 진통이 왔다. 날카롭게 꽂혀오는 통증에 숨이 막혔다. 폴이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세 시간후에 내 아들이 태어났다. 크리스와 폴이 곁에 있어주었다. 둘 다 눈물을 글썽였다. 아이 아버지 이름은 줄리언 제이너스 마르케야. 하지만 난 애를 조리라고 부를거야. 왜 조리라고 부르려고 해? 폴이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기력도 없었고 졸음이 쏟아졌다. 크리스는 내가 그렇게 이름을 지은 이유를 이해했다. 내가 말했다. 아이가 금발이면 코리(죽은 막내동생)라고 부르려고 했죠. 조리는 줄
리언과 코리를 합친 이름이예요.
난 운이 좋고 행복한 여자였다. 나에겐 줄리언 보다 백배, 아니 천배 이상 나은 두 남자가 있다.
'해우소--3'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5 (0) | 2015.04.10 |
---|---|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4 (0) | 2015.04.07 |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3 (0) | 2015.04.05 |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1 (0) | 2015.04.01 |
다락방의 꽃들 (0) | 2015.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