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런갱어 시리즈 2.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1
폭스워스 가에서 4년 가까이 갇혀 지내고 밖으로 나왔을때 나는 열다섯 살, 오빠 크리스는 열일곱 살, 캐리는 여덟 살이었다.
우리는 폭스워스 저택의 버지니아 주를 벗어나 남쪽으로, 플로리다 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오랫동안 햇볕과 바깥공기를 접하지 못해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캐리가 버스안에서 쇼크상태에 빠져 계속 토를 하는 바람에 승객들을 안타까움과 함게 불쾌하게 만들었
다. 버스 맨 뒤에 앉아 있던 몸집이 큰 흑인 여성 한 명이 우리를 도왔다. 병원이 너무 멀어 못 간다며 기사가 난색을 표하며 화를 내자 흑인 여성은 그렇다면 관계당국에 고발해 감당못할 벌금을 물게 하겠다며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차를 몰라며 기사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헨리에타라는 이름의 흑인여성이 우리를 데려간 곳은 그녀가 가정부겸 요리사로 있는 의사의 집이었고 집은 진료를 할수 있게끔 되어있었다. 나이가 마흔줄은 되어 보이는 폴 세필드 박사 집에서 몇 주 지내면서 안정을 되찾았지만 계속
신세지는 것이 미안해 떠나려 하자 캐리가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박사도 고아나 다음없는 어린 너희들이 세상에 나가서 대체 뭘 하겠다는 거냐며 나도 홀몸이고 하니 그냥 편하게 같이 살자고 설득한다. 그리고 법정 후견인이 되어 너희들의 양육권을 갖겠다고까지 했다. 지금은 엄마와 마주치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나는 아버지의 사망 확인과 친모의 동의를 구해야만 양육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폴 세필드 박사의 설득으로 폴 세필드 박사가 법원에 자신을 법정 후견인으로 등록했고 법원에서는 엄마 코린에게 심
리를 받으러 나오라는 출석 통보서를 보냈다.하지만 크리스와 케리등 모두가 법원에서 기다렸지만 코린은 나오지 않았고 나는 자신이 버린 자식들의 인생은 전혀 관심이 없고 존재 했었다는 자체를 잊어버리려 얘쓰는 엄마에 대한 냉혹한 복수를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나는 그해 마지막 달인 12월에 폴 세필드 박사의 도움으로 그린글레나에 가서 발레 학교 오디션을 보고 합격을 했다.
다음 해 1월 수학능력 시험을 치르고 나는 고등학교 1학년 자격을, 크리스는 대학 예비학교에 들어갈 자격을, 캐리는 초등학교 3학년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
나만 남고 크리스와 케리가 폴 세필드 박사의 집을 떠나게 된 것이다. 캐리는 이곳에서 15킬로 떨어진, 부유층 여식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떨어져 있기 싫다며 울고 불고 떼를 쓰는 통에 달래느나 무척이나 힘들었다. 주말마다 박사님과 데리러 온다고 캐리를 안심시켰다. 캐리를 학교에 두고 떠나오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
았다. 나이에 비해 키가 너무나 작고 머리크기만 자라버린 캐리가 또래들과 잘 어울려 학교생활에 온전히 적응을 할지가 무척이나 걱정이 되었다.
다음날은 오빠 크리스가 떠났다. 그가 짐을 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쓰라렸다. 오빠와 나는 서로 눈길을 마주치기조차 힘겨워했다. 그의 학교는 더 멀었다. 이곳에서 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오빠없이 어떻게 살지?"
헤어지기를 애달퍼하는 오빠와 나의 모습을 눈치챈 폴 세필드 박사가 자리를 피해 주었다. 나는 이곳에서의 헤어짐이 사랑에 작별을 고하는 것, 우리의 사랑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 적어도 나쁜 짓을 할 일은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을 우리 둘이 다 알게 될 만큼 완전한 작별이기를 원했다.
크리스는 떨어져 있어도 달라지는 건 없다고 했다. 다음에 보더라도 우리의 감정은 여전히 같을거고 언제까지나 날 사랑할거라고 했다. 나도 오빠를 향한 사랑은 변함없지
만 부모님이 했던 실수를 되풀이할 수 없다고 했다.
4년 가까이 감방같은 고립무원에서의 생활은 남매가 아니라 이렇게 이성으로의 감정으로 뒤바꿔 놓았다. 폴 세필드 박사집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애틋한 감정을 억누르려
고 무척이나 애썼다. 밤이면 그리워 서로의 방에서 만나 주체할 수없는 감정으로 부둥켜 안았지만 용케도 서로가 자제를 했다.
크리스는 헤어지면서 날 지독히도 예쁜게 생겼다고 했다. 마치 엄마가 여기 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미모로 폴 박사의 혼을 너무 빼놓지 말라고도 했다.
외모로 말할 것 같으면 오빠도 누구 못지 않았다. 쌍둥이들과는 달리 오빠는 키가 훌쩍 컸으며 길 가다가도 누구나 한 번쯤 뒤돌아 볼 정도로 미남으로 자랐다.
등을 돌려 그를 떠나는 나의 가슴은 아프다 못해 산산히 부서져 내렸다. 그를 곁에 두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까? 그녀, 엄마가 우리에게 저지른 짓 또 하나가 이것이었다. 절
대로 하지 말아야 할 방식으로 우리가 서로를 너무 아끼게 만든 것, 그녀 탓이다. 언제나 그녀 탓이다. 우리 인생에 잘못된 모든 것은 그녀가 저지른 짓 때문이다.
나는 몸을 돌리고 뛰었다. 기다란 복도를 내달리는 동안에 눈물이 흘렀고, 이윽고 한환 햇살속으로 나왔다. 폴 박사의 차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캐리가 울부짖을 때처럼 흐느켰다.
집에 돌아와서 코린에게 부칠 편지를 썼다. 독기로 가득찬 편지를 썼다. 어디로 부쳐야 할지 알 수없어 그린글레나의 주소를 알 때까지 편지를 치워두었다.
폴이 보내준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면 발레학교로 갔다. 내가 유일하게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발레 학교에서 알게된 남자 줄리언, 학원장의 아들로,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한 발레리나 가문의 아들로 벌써 발레계의 신성으로 떠오르고 있는 남자였다. 크리스
못지 않게 잘 생겼고 나에게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고 내가 귀찮아 하면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다.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로 발전한 그와의 관계는 그렇다고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멋진 레스토랑으로 나를 데려갔고 화려한 클럽에서 같이 춤을 췄다. 이벤트를 열어 나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나와 반쯤은 사랑에 빠졌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저돌적인 성격의 남자였다.
하지만 그와의 관계는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 같은 죄책감을 들게 하기도 했다. 그와 크리스가 만나면 서로 으르렁 거렸다. 또 한 사람, 폴 세필드 박사, 혼자인 그가 자꾸만 신경이 쓰일데가 많았다. 그는 우리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크리스가 언젠가는 이 은혜를 모두 갚겠다고 폴에게 말하기도 했지만 그의 외로움을 모른척 할 수없었고 나는 관능의 몸 짓으로 그에게 다가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나를 나무랐지만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도 남자임이 분명했다.
가끔 신문에서 엄마 코린의 소식을 접했다. 폭스워스가를 개축했다는 것과 그의 동향을 실은 기사등등이었다.
내 꿈은 뉴욕 무대에 서는 것이었다. 줄리언은 뉴욕에 나를 데려가고 싶어했지만 나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뉴욕 무대의 객석에서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코린을 상상하면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즘에 폴 세필드 박사가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결혼을 했었고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마누라도 애도 죽었다고 했다. 어릴때부터 쭉 같이 자라온 마누라 줄리아는 섹스를 좋아하지 않았고 불결해 했다. 어느날 그가 강간을 했다. 줄리아는 스코티를 낳았고 이후에는 자신의 몸에 손도 대지 말라고 했다.
폴은 밖으로 떠돌았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여자의 몸을 사기도 했다.
스코티가 세 살 때 줄리아와 스코티가 강에서 시신으로 떠올랐다. 줄리아가 스코티를 안고 강에 뛰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줄리아에게서 엄마 코린을 떠 올렸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식을 희생시킨 점에서 닮아보였다.
나는 그에게 내 몸을 주려고 했지만 그는 두 번다 거절했다.
캐리는 주말마다 집에서 지냈고 그녀는 주말이 자신의 생애 최고의 시간인 듯 즐거워했다. 나는 그녀의 작은 몸을 볼때마다 가슴이 찢어졌다.
뉴욕에 가면 자신의 연인이자 댄스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틈만 나면 졸라대던 줄리언,
줄리언이 나를 뉴욕에 데려가야 한다고 할 때마다 크리스와 부딪쳤다. 나 이외에는 어떠한 여자도 성에 안차는 크리스는 캐시가 연애할 나이가 아니며 뉴욕에 갈 준비가
되지 않았고 내 동생은 아직 미성년자다며 화를 냈다.
줄리언은 니가 춤에 대해서 뭘 알아? 쥐뿔도 모르는게 나선다며 맞받았다. 멱살 잡이에다 주먹다짐까지 갈 뻔할 때도 있었다.
그린글레나 시청에 가서 엄마의 출생 증명서를 살폈다. 새 남편인, 폭스워스 홀에서 엄마와 춤을 추던 그 변호사 바트 윈슬로의 출생 증명서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엄마
보다 여덟살이나 아래였고 그가 살았던 집도 알아냈다.
그린글레나 도서관에 가서 바트 윈슬로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그곳의 한 사교계 담당자가 바트 윈슬러의 아내(엄마 코린)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엄청나게 부자이며 이 상속녀는 미국의 가장 큰 부호 가운데 한 명"이라는 칼럼도 읽었다.
엄마가 그린글레나로 살러 온다고 덪붙힌 칼럼이 실린 신문을 집에 와서 크리스에게 보여줬다. 크리스는 못마땅해했다. 그로서는 당연했다. 그는 아직도 엄마에 대해서 우호적이진 않지만 복수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 터졌다. 캐리가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지옥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캐리는 주말이면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제 쌍둥이 한쪽이 죽었을
때처럼 비탄에 젖어 있는 조용하고 무심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주말을 집에서 지내고 학교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표정이 어두워지고 두 눈은 멍해졌다.
백명 가량의 학생중에 캐리는 가장 작았다. 얘들은 캐리를 난장이라고 불렀고 기형아라고 놀렸다. 옷을 벗기고 서커스의 원숭이 취급했다. 자신을 측은하게 생각해오던 아이가 캐리를 편들고 나섰다가 흠씬 두들겨 맞았다. 급기야는 편을 갈라 싸우다가 주말 휴가금지라는 처분을 받았다. 캐리도 포함되었다.
이 소식을 교감으로 부터 전해 들었고 캐리는 데려오지 못했다. 그 다음주에 학교에서 캐리가 사라졌다는 전화를 받았다.
캐리가 기숙사 다락방에서 발견되었다. 잠옷을 입은채로, 피투성이에다 재갈이 물리고 다리가 부러진채로, 나는 캐리의 룸메이터가 뒤로 숨기고 있던 캐리의 클라라 인형을 빼았았다.
이러는 사이 내가 구독하는, 폭스워스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는 버지니아 신문에 우리의 엄마가 여기저기 신나게 쏘다니며 파티를 가고 제트기를 가진 부자들과 영화 스타들과 어울리고 다니는 기사가 났다. 나는 그 기사를 오려서 커다란 복수의 스크랩 북에 붙여놓았다. 이 기사를 오빠에게 보여줬다. 오빠는 난 너와는 달리 잊으려고 애쓴다고 했다. 내가 무엇이라도 엄마 탓으로 만들려고 하면 반대로 좋은 점을 보려고 하는 그에게 화가 났다. 캐리가 왜 크지 않는지 그도 나 만큼이나 잘 알았다. 사
랑과 햇볕과 자유를 박탈당하고도 살아남았다. 크리스에게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가서 의학책에다 코나 박고 있어! 라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많은 신문에서 찾아낸 기사와 흐릿한 사진을 하루하루 바쁘게 내 소장품에 덫 붙였다. 그녀의 남편이란 사람은 엄청나게 잘 생겼다.
코린 여사에게 편지를 써서 특급 우편으로 보냈다. '친애하는 윈슬로 여사님, 당신이 신혼여행을 갔던 그 여름이 얼마나 잘 기억이 나는지 몰라요. 멋진 여름이었지요. 산
중에서,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창문들이 달린 갇힌 방에서 얼마나 상쾌하고 유쾌했는지 몰라요. 더 없는 진심을 담아 축하드립니다. 윈슬로 여사님. 그리고 나는 앞으로 다가올 당신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네 명의 드레스던 인형이 겪었던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기억에 쫒기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제는 당신의 것이 아닌 의사 인형, 발레리나 인형, 키가 더 크기를 기도하는 인형, 그리고 죽은 인형이....'
다리를 치료받고 나은 캐리를 집 근처 공립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캐리는 학교에서 누구도 사귀지 못했고 놀림과 괴로힘을 당하는 건 여전했다.
폴 세필드 박사의 생일을 준비하느라 발레 수업까지 빼먹었다. 하지만 의학 총회 때문에 밤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크리스, 캐리, 헤니도 지쳐서 잠자리에 들었다.
비행기가 연착되어서 늦었다며 미안해하는 폴에게 나는 성질을 부렸고 그는 나를 포옹하며 위로했다. 둘이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어찌어찌하다가 그와 내가 서로 껴안고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었다. 그가 나를 들쳐안고 침대로 갔다. 우리는 맨살을 맞대었고 그의 손 길이 닿을 때마다 전기에 감전된 듯한 감각이 휩쓸고 갔다. 내 몸 안으로 그가 깊숙히 들어왔다. 내 다리는 그의 허리를 둘렀고 그의 허리가 거칠고 맹렬하게 들썩 거렸다. 그의 몸과 내 몸은 미끌미끌 땀으로 흠뻑 젖었고 아랫도리는 마찰열로 불꽃이 튈 것 처럼 뜨거워 지고 있었다. 뜨거운 액체가 내 아랫도리 깊은 곳으로 몇 번씩이나 뿜어져 들어왔다.
당시 내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고 그는 나보다 25살이나 많은 마흔한 살이었다.
우리는 밤마다 육체를 불태웠다. 그의 혀가 나의 그곳에 닿은 날은 내 몸은 지상에 없었다. 헤니가 쉬는 날이면 더러워진 시트를 세탁했다. 크리스가 집에오면 우리는 서로 쳐다보지 않는 것으로 시치미를 뗐다. 지난 일은 지난 일로 묻어 두자는 크리스의 말을 무시하고 코리가 묻힌 곳을 찾으려 버지니아 주 살럿츠 빌로 갔다. 하지만 이병원 저병원 다 돌아 다녔지만 2년전 10월말에 폐렴으로 죽은 여덟 살 짜리 남자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공동묘지들에도 코리 나이의 남자아이가 묻혔다는 기록이 없었다.
1963년 1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크리스는 몹시도 우수해서 3년만에 대학을 마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해지고 있었다. 크리스는 제 교육에 드는 재정적인 짐을 폴의 어깨에서 덜어줄 장학금을 이미 몇 번이나 받았다. 폴은 우리 가운데 누구에게라도 갚으라는 얘기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크리스가 의학박사 학위를 따면 폴과 함께 일하는 것으로 얘기가 되었다. 그 동안 나는 로젠코프 발레단에서 호두까기 인형과 신데렐라등의 공연을 하며 경험을 쌓아갔다.
단원들이 돌아간 후 연습실이 비면 연습실은 내 차지가 되었다.
발레의 본 고장인 뉴욕으로 가던날 캐리가 가면 안된다고 난리를 쳤다. 뉴욕에서 언니가 꽉 죽어버렸으면 해! 라고 악담을 퍼붓기도 했다. 캐리의 악을 쓰는 소리에 귀가 먹먹하고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공항에서 줄리언이 초조하게 시계를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가 뉴욕에 착륙했을 때 눈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코로 흘러 들어오는 냉기에 몸서리가 쳐졌다. 발레단의 발레 여교사인 마담 졸타를 만나고 발레단 근처에 마련된 아파트에 정착을 했다. 작은 방 세 개가 있는 아파트를 다른 무용수 두 명과 함께 썼다. 뉴욕에 일곱 달째 살았고 주말에도 연습을 했다. 내가 줄리언과 파트너가 되어 주인공 역을 맡아야 한다고 마담 졸타가 생각할 때까지 연습했다. 내가 속한 발레단은 내게 행운을 가져다 줬다. 다른 발레단과 경쟁하고 있던차에 텔레비젼을 통해 내가 호두
까기 인형으로 데뷔를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기쁜 소식을 장거리 전화로 폴에게 알렸다. 크리스와 캐리의 안부도 물었다.
호두까기 인형을 녹화하고도 쉴 틈이 없었다. 출연하기로 한 무용수가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잠자는 숲속의 미녀도 내가 케스팅 되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줄리언과 나는 여덟 번의 커튼 콜을 받았다. 빨간 장미꽃들이 내품에 쉴 새 없이 꽂혔고 무대 위로 던져진 꽃들도 한가득이었다. 한 송이의 미나리아
제비꽃이 바닥에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접은 종이가 꽃을 누르고 있었다. 꽃을 집어 메모를 읽어보기도 전에 크리스에게서 왔다는 걸 곧바로 알았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얼굴들을 찾아내려고 객석의 흐릿한 얼굴들을 무작정 쳐다보았다. 내 눈앞에 다락방이 아른 거렸다. 그 음침한 2층 다락방에서 춤을 추고 또추는 나를 바라보는 크리스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울고 있었고 관객은 내가 우는 모습에 또 감동했다. 그들은 내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나는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줄리언에게 건네주었고 그들은 다시 천둥처럼 박수를 쳤다. 무대뒤에서 우리가족이 찬사를 퍼부어댔다. 크리스는 더 자랐지만 캐리는 고만고만했다. 폴과 헤니를 포옹했다. 폴의 얼굴을 응시했다. 우리의 눈길이 얽혔다. 그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원할까? 그는 내 지난번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공연 뒷풀이에서 크리스가 우리 발레단의 동료인 욜란다와 함깨 춤을 추다가 밖으로 사라졌고 피곤해하는 헤니와 캐리를 호텔에 데려다 주고 폴과 나는 카페에 잠시 들어갔다가 차만 마시고는 가까운 호텔에 들어가서 우린 다시 알몸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는 나한테 청혼했고 나는 최고의 아내가 되겠다는 걸로 대답을 했다.
크리스에게 어떻게 말할까? 그게 걱정이었다.
발레리나로서의 나의 미래는 장밋빛이었다. 파트너인 줄리언과 인지도를 높여갔고 마담 졸타는 우리의 급료를 올려주었다. 거기다가 전도유망한 당쇠르 줄리언에게 마담이 자신이 타고 다니던 케딜락까지 줬다. 줄리언은 이소식을 전하면서 마담이 너와 내가 다른 발레단으로 갈까봐 어쩔수 없이 줄수밖에 없었다고 까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을 했다. 줄리언은 나를 원했다. 내 몸을, 내 육체를 원했다. 물론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그게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매몰차게 거절했다. 사창가를 드나들고 같
은 발레단 발레리나들을 꼬시고 잠자리까지 끌어들이는 짓을 서슴치 않는게 줄리언이었다. 마담 졸타가 케딜락을 준 날도 그와 나 사이에 있어서 최악의 날 중 하루였다.
우린 드라이버를 즐기러 교외로 나갔고 줄리언이 서서히 내 비위를 건드렸다. 날 사랑하지 않는 거니? 다른 남자가 있어? 그 의사와 무슨 섬씽있지? 그 빌어먹을 의사가 널 보는 시선이 야릇하다는 것을 오래전에 느꼈어, 너네 오빠도 마찬가지였어 라는 등등...하지만 난 폴과의 관계를 말하지 않았다. 내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니가 처녀
라서 그런거지? 내가 다정하게 해줄게 부드럽게 해줄게라며 욕정을 드러내는 말까지 했댔다. 나는 집에 데려다줘! 역겨워!라고 대꾸했고 내 말에 열이 뻗친 줄리언은 길거리에 나를 내팽개치고 가버렸다. 백을 차에 두고 내리는 바람에 빈 손으로 택시를 탔다가 기사한테 있는 욕 없는 욕 배터지게 얻어먹고 줄리언의 아파트에 가서 또 한 바탕 붙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그의 따귀를 올려 붙였다. 그도 내 양쪽빰을 연달아 후려쳤다. 그는 지옥에나 가버리라며, 하느님께 그러길 기도할 거란 악담도 퍼부었다.
뉴욕공연때 크리스의 빛나는 외모에 홀딱 반해 크리스를 데리고 나가 데이트까지 즐겼던 동료 발레리나 욜란다는 나에게 노골적으로 오빠 크리스를 원한다며 내가 어떠한 역할이라도 좀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난 몸을 아무렇게나 굴리고 마음에 드는 남자라면 누구라도 잠자리를 같이 하는 여자에게 크리스라니,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코린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공연하는 줄리언과 나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동봉해서, 이제 오래 걸리지 않아요. 윈슬로 여사님.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생각하세요. 내가 어딘가에서 여전히 살아 있고, 당신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있는 중이란 걸 기억하세요.
어느 날 줄리언이 내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잠결에 가버려! 내 인생에서 꺼져버려! 라고 소리쳤다. 그가 아랑곳 않고 문을 열지 않으면 부숴 버린다고 고함쳤다.
그가 우리가 런던으로 순회공연을 가게 됐다고 말했다. 너무나 기뻤다. 우리는 언제 싸웠냐는 듯이 서로 손을 맞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리고 내친 김에 말했다. 줄리언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약혼한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증오로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거짓말이야!라고 외쳤다. 나를 유혹한 넌 지옥에 가야해! 라고 덪붙이며 아파트를 박차고 나갔다. 난 춤출 때를 말고는 그를 유혹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춤출 때에는 내 역할만 따랐을 뿐이다.
뉴욕공연을 앞두고 크리스마스때 사우스 케롤리나로 갔다. 크리스, 폴, 케리가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키스하려는 크리스를 외면해야 하는 내 가슴이 쓰라렸다. 폴, 그도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오빠의 품에서 빠져나와 폴에게로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캐리는 키가 조금 자라 건 같았지만 별로 표도 나지 않았다. 뉴욕의 모든 상점을 뒤져서 산 붉은색 드레스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너무 기뻐서 비명을 질렀다. 그녀를 볼 때마다 죽은 코리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뉴욕의 거리에서 금발 고수머리에 푸른 눈을 한 작은 소년을 보고 흠칫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무슨 기적이 일어나 내 동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를 뒤쫒아 가곤했다. 코리가 아니었다. 한
번도 코리인 적이 없었다. 크리스는 내 손에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진짜 다이아반지 같았다. 자기 손으로 힘껏 번 돈으로 샀다고 했다. 그리고 접은 쪽지를 슬그머니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중에 틈을 보아 읽는데 눈물이 나고 말았다. 나의 레이디 케서린에게, 당신에게 잘 보이지도 않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을 드리오 하지만 그대에게 품는 내 감정을 전부 다 나타내려면 보석이 성의 크기는 되어야 할 것이오. 그대에게 금을 주는 까닭은 금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오, 영원히 바다같은 사랑이기 때문이오. 당
신의 오빠일 뿐인, 크리스토퍼.
그날 밤에 폴의 방에서 폴과 사랑을 나누고 나오다가 크리스와 마주쳤다. 크리스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는 분노에 가득한 눈빛으로 역겹다는 듯이 쏘아 보았다. 죽고 싶었다. 캐리방에 갔다. 캐리는 내가 사준 벨벳 드레스를 품에 꼭 안고 잠들어 있었다. 다음날 크리스는 나에게 폴은 나이가 너무 많다고 했고 나는 그를 사랑한다고 했
다. 런던 공연을 앞두고 뉴욕에서 리허설과 로미오와 줄리엣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물론 연습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줄리언과 사사건건 부딪쳤고 서로 못잡아 먹어서 으르렁거렸다. 커텐이 내려가면서 카메라 플레쉬가 불꽃처럼 터졌고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줄리언조차 오늘 최고였다며 나를 꼭 껴안았다. 커튼이 올라가고 줄리언이 내게 키스를 했다. 사람들이 브라보를 외쳤다. 이런 장면이 발레광들이 원하는 종류의 드라마였다. 런던으로 떠나기전에 열리는 축하 파티에 한 여성이 찾아왔다.
값비싼 옷들로 치장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폴의 누나 아만다였다. 그가 언젠가 나에게 누나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폴과의 사랑은 불장난이라고 했다. 그녀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사진에는 병색이 완연한 가련한 여인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자는 폴의 마누라고 아직 살아있다고 했다. 아직 법적으로 자기 동생의 아내라고 말했다. 아무리 변한 모습이라고는 하나 줄리아의 사진을 많이 보아 왔던 터라 나는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폴이 내게 거짓말을 했으며 결혼한 상태이면서 나를 취했다는
것 말고는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연인지 어떤지 그날따라 줄리언이 배려깊고 사려깊게 나를 대했다. 그가 사랑한다고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미쳐 버린다고 했다. 그가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비 내리는 토요일, 줄리언과 나는 우리를 축하해줄 친한 친구들과 시청안에 있었다. 주례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 까지라는 말로 우리를 하나로 묶었다.
서약을 하는 순간에 이르자 도망쳐서 폴에게로 날아가고 싶었다. 줄리언이 날 꼭 끌어안았다. 그의 진한 눈이 사랑과 뿌듯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런던으로 가는 대서양 바다위 비행기안에서 그가 속삭였다. 내 사랑 예쁜 사랑, 환상적인 남편이 되어줄게라고 맹세했다.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속으로 통곡을 했다.
그리고 나는 내 평생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고 끈질기게 들러붙는 생각을 지우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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