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런갱어 시리즈--2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6
바트가 그의 거대한 집보다 나의 작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는 나와 내 아들에게 선물 더미를 안겼다. 사무실에 나가지 않는 날이면 아침, 저녁을 우리와 함께 먹었다. 그 사무실은 정말로 일을 하는 곳이라기보다는 명목상 운영하고 있는 곳 같다는게 나의 은근한 믿음이었다. 그 때문에 무용학교 운영이 곤란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아니었다. 이제 나는 임자가 있는 여자였다. 그의 돈을 받는 정부였다.
조리는 바트에게 작은 가죽 부츠를 받고서 신이 났다. 아저씨가 내 아빠예요? 돌아오는 2월에 네살이 될 내 아들이 바트에게 물었다. 아니, 하지만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지. 콩콩 걸어 다니며 카우보이 부츠를 뽐내는 제 발에 푹 반한 조리가 문을 나가자마자, 바트가 나를 한 번 쳐다보고 지친 듯이 의자에 풀썩 앉았다. 우리집에서 무슨 일이 났는지 짐작도 못 할거야. 웬 사디즘 환자가 장모님 머리카락에 촛농을 떨어뜨려놓았지 뭐야. 엉덩이는 기다란 채찍 자국이 있었
어. 낫지 못할 거야. 간호사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했지. 내가 올리비아(할머니)에게 질문했어. 아는 사람이었느냐고, 하인은 아니었느냐고 말이야. 눈을 두 번 깜박였는데, 그건 아니라는 뜻이야. 한 번은 맞는다는 거고, 진짜 미치도록 화가 나! 하인 중의 한 명이 틀림없어. 거동도 못해서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하는 무기력하고 늙은 여인을 괴롭히려고 그런 잔인한 짓을 저지르다니, 이해 할 수가 없어. 내가 말한 이름은 하나도 맞지 않다고 하고, 코린한테 그녀를 잘 돌보겠다고 약속했는데, 이제 엉덩이가 그
렇게 쑥대밭이 됐으니 하루에 두 시간에서 네 시간은 엎드려 자야해. 그리고 밤이 되면 돌아눕지. 난 그의 말에 약간 긴장했지만 그 정도로 끝낸 것도 천만 다행인줄이나 아셔! 라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리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런 끔찍한 일이. 왜 낫지 못한대요? 혈액순환이 좋지 않아. 좋을 리가 있겠어? 정상적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잖아. 그러고는 그가 폭풍우 뒤에 얼굴을 내밀고 나오는 햇살처럼 밝게 웃었다. 캐시, 네가 걱정할 일 아니야. 내 문제지, 네 문제가 아니야. 그리고 물론 그녀의 문제이기도
하고. 그가 팔을 뻗쳤고, 나는 재빨리 그에게 가서 그의 무릎에 안겨들었다. 그가 열렬하게 키스를 퍼붓고 나서 나를 내 침실로 데려갔다. 그는 나를 눕히고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는 분이 안풀리는지 또 내뱉었다. 그 짓을 저지른 마귀 같은 놈의 목을 비틀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지!
우리는 사랑을 나누고 나서 조리가 그에게 받은 토이푸들 뒤를 쫒아가면서 내는 꺄악꺄악 웃음소리를 들으며 뒤얽혀 누워 있었다. 조리의 웃음소리에 바람 소리가 섞여 들
었다. 눈발이 약간씩 휘날리기 시작했다. 조리가 눈이 온다는 얘기를 하려고 달려 들어올 것이었다. 우리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면 어서 일어나야 했다. 조리는 눈을 기억하지 못했고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 할 테지만, 땅바닥은 설탕을 뿌린 정도밖에 덮이지 않을 듯했다. 나는 한숨을 먼저 내쉬고 나서 바트에게 키스를 하고, 그의 품에서 마지못해 몸을 빼냈다. 등을 돌리고 비키니 팬티를 입는데, 그가 팔꿈치를 괴고 몸을 일으켜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뒷모습이 아름다워. 그의 찬사에 나는 고맙다고 했
다. 앞은 어떤데요? 그가 나쁘지 않다고 대답했다. 좋아라고 말하면 어디가 덧나나, 나는 기분이 나빠서 그에게 신발 한 짝을 집어 홱 집어 던졌다. 캐시, 왜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지? 나는 그 말에 놀라서 몸을 돌렸다. 당신은 그 말을 나한테 하면서 진심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요? 나는 자그만한 브래지어의 고리를 채웠다.
진심이 아닌지는 어떻게 알지? 그가 화를 냈다. 어떻게 아는지 말씀드리죠. 사랑에 빠지면요, 그 사람과 언제 어디서나 같이 있고 싶은 법이에요. 당신이 이혼 얘기를 회피
하는 게 당신이 날 얼마나 생각하고, 당신 인생에서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많은 걸 알려준다고요. 캐시, 그간 상처 받은 모양이군. 난 너에게 더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넌 나와 게임을 벌이지. 그건 늘 알고 있었어. 한데 만약 그냥 섹스일 뿐이고 사랑은 아니라면 뭐가 문제야? 그리고 어디서 하나가 끝나고 다른 게 시작되는지 넌 알 수 있어? 그가 골리는 말이 칼이 되어 내 심장에 박혔다. 어쩌다가 보니,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나는 미친 듯이, 바보 천치같이 그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바트가 열심히 나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그의 아내는 몰라보게 젊고 아름다워진 모습으로 긴 회춘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가 말했다. 그녀가 10킬로그램 가까이 살이 빠졌어. 그 주름살 제거 수술이 기적을 일으켰더라고, 맹세해! 정말 눈부신 모습이고, 제길, 믿을 수 없도록 너와 똑같으니까! 그가 새롭고 젊어진 모습의 아내에게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쉽사리 엿보였다. 그리고 그가 너무도 확신에 찬 나의 항해에서 바람을 빼앗아 가려는 의도로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그렇다고 해도 나는 거기에 넘어갔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내가 전과 다름없이 자기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어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캐시, 그녀는 텍사스 주에 가 있는 동안에 사람이 바뀌었어. 꼭 원래 그녀처럼, 내가 결혼했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 같아. 난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남자들이란 얼마나 속여먹기 쉬운 족속인가! 당연히 내 어머니는 그에게 더 다정하고 더 잘 대해줄 것이다. 이제 그녀는 그에게 매우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정부가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 다른
여자란 자기 자신의 딸이었다.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사방팔방에서 다 속닥거리는 얘기였다. 소문은 이미 파다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 부인이 돌아왔고, 그분이 나와 그렇게 똑같은데 왜 여기 나와 함께 있는거죠? 옷 주워 입고 나서 잘 있으라고 말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면 되잖아요? 그간 달콤했다고, 하지만 이제는 다 끝났다고 말해요. 그러면 전 당신에게 그동안 멋진 시간을 보내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작별의 입맞춤을 하면 되니까요. 그게에...할 말이 없는 듯 말꼬리를 흐리
는 그가 벌거벗은 제 몸에 나를 끌어당겨 꼭 안으며 말을 길게 늘였다. 그녀가 그 정도로 대단한 모습이라는 얘기는 아니었어. 너 한테는 똑 특별한 구석이 있거든. 뭐라고 콕 집어서 말은 하지 못하겠어. 이해도 할 수 없어. 하지만 이제 너 없이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눈에 진실이 담겨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와 내가 우체국에서 퍽 우연찮게 마주쳤다. 그녀가 나를 보더니 가볍게 몸을 떨었다. 나를 모르는 체하며 살짝 몸을 돌리는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가 꼿꼿하
게 들렸다. 그녀는 캐리를 부정했던 것과 똑같이 나도 부정할 것이었다. 우리가 낯선 사람들이 아니라 모녀 사이임은 누가 봐도 뻔히 보이는데도 말이다. 나는 캐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나를 대한 것과 똑같이, 그녀가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며 그럴 일도 결코 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우표 살 순서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와중에 그녀의 눈길이 내 어린 아들에게 꽂히는 것이 보였다. 모든 것을 보고, 모든 사람을 쳐다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내 어린 아들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잘 생기고 우아하고 매력적인 사내아이였고,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보고 감탄하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조리는 타고 나기를 꾸미지 않고 여유 있게 행동하는 아이였다. 어디에 가거나 편하게 있었다. 온 세상이 제 것이고, 모든 사람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가 자기를 한참 바라보는 걸 알아채고서 그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예뻐요, 우리 엄마처럼. 아, 아이들이 하는 말이란! 무슨 순수한
지식이 있기에 다른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기를 거부하는 것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눈에 보이는 걸까. 그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모피 코트를 머뭇거리며 만졌다. 우리 엄마한테도 모피 코트가 있어요. 우리 엄마는 무용수예요. 아줌마도 춤출 줄 알아요? 조리의 말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숨을 죽였다. '봐요, 엄마. 당신이 영원히 품에 안지 못할 당신의 손자가 있어요. 그 아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결코 듣지 못할 거예요....절대로!'
조리의 말에 그녀는 나직하게 말했다. 아니, 난 춤추는 사람이 아니야. 그녀의 눈에 눈물이 배었다. 코리가 다시 말했다. 우리 엄마가 가르쳐줄 수 있는데. 난 뭘 배우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단다. 그녀가 물러서며 속삭였다. 아니에요. 조리가 마치 가는 길을 알려주겠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힐끗 보고 얼굴이 붉어지면서 손을 빼내고는, 핸드백에 손을 넣어 더듬거리며 손수건을 찾았다. 저랑 놀 수 있는 어린아이 있어요? 그녀의 눈물을 보며 걱정이 된 내 아들이 물었다. 마치 그
녀에게 아들이 있다면 춤을 출 줄 모르는 게 보상이라도 된다는 듯이. 없어. 그녀가 약하고 떨리는 속삭임으로 말했다. 난 아이가 없어. 그때 내가 나서서 차갑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여자들은 아이들을 가질 자격이 없죠. 나는 우표값을 치르고 우표를 핸드백에 넣었다. 윈슬로 여사님, 당신 같은 여자들은 좋은 시절에 방해가 될 아이들이라는 짐을 지기보다는 돈을 택하죠. 당신이 옳은 결정을 내렸는지는 조만간 시간이 알려줄 거예요. 난 그렇게 쏘아 붙였다. 그녀가 그 모피 털을 다 합해도 따뜻하지
가 않다는 듯이 등을 돌리고 떨었다. 그러고는 우체국을 나가 기사가 운전하는 검은색 리무진으로 향했다. 그녀는 여왕처럼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서 차를 타고 떠났다. 흥! 그러나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것이다. 자신이 내버렸던 맏딸을 몇 년만에 만났는지 생각하면 기가 막히기도 할 것이다. 조리가 물었다. 엄마, 엄만 왜 저 아줌마를 싫어해? 아주 좋은데. 엄라랑 닮았어. 그냥 엄마만큼 예쁘지 않을 뿐이지. 조리가 평생 잊지 못할 추잡한 말이 혀끝을 맴돌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해가 질 무렵 창가에 앉아 폭스워스 홀을 바라보며 바트와 내 어머니가 뭘 하고 있을지 궁금증에 잠겼다. 내 손은 아직은 납작한 배위에 있었다. 그러나 내 배는 어쩌면 생겼을지 모르는 아이로 곧 부풀어 오를 것이다. 월경 한 번 건너뛴 것으로는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지만, 나는 바트의 아이를 원했다. 그리고 내게는 사소한 단서만으로도 아이가 있다는 확신이 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우울증이 밀려와 나를 채우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는 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이유로 그녀와 그녀의 돈을 떠나지 않
을 테고, 나는 아버지 없는 아이를 또 한 명 얻을 것이다. 이 모든 짓을 시작한 게 얼마나 바보 같은지, 그 중에서도 최악의 바보짓은 내가 바트의 아이를 낳은 거였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내가 낳은 그아이는 악마였다. 나는 언제나 바보였다. 그때 숲을 뚫고 슬그머니 다가오는 남자가 보였다. 나는 다시 자신감을 느끼며 웃음을 지었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정말이었다....그리고 그 사실을 아주 확실히 알게 되자마자 그에게 아버지가 된다고 알릴 참이었다. 바람이 바트와 함께 들어와 탁자 위 장미꽃이 담
긴 화병을 쓰러뜨렸다. 나는 일어서서 부러진 크리스털 꽃병과 꽃잎들이 흩어지는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왜 바람은 항상 내게 무언가를 말해주고 싶어 할까? 내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무언가를!
캐시, 네가 나한테 피임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그가 화를 벌컥냈다. 필요 없었어요. 난 당신의 아이를 원하니까요. 그러니 말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캐시,내 아이를 원한다고? 대체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너랑 결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아니에요. 나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어요. 당신은 나와 재미를 보고, 그게 끝나면 아내와 새로운 놀이 친구에게 갈 거라고요. 그리고 난 내가 갖고자 한 것을 손에 넣게 되는 거예요. 당신의 아이요. 이제 난 떠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그냥 키스해줘요, 바트.
당신이 혼외로 벌인 또 다른 작은 불장난들에게 한 것 처럼 말이에요.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우리는 우리 집 거실에 있었고, 바깥에는 맹렬한 눈보라가 불고 있었다. 눈이 창문까지 산더미처럼 쌓였고, 나는 아기 포대기를 뜨고 있었다. 포대기를 뜬 다음에는 양말을 뜰 생각이었다. 뜨개질을 하고 있는데 바트가 내 손에서 뜨개질감을 쥐어서 집어 던졌다. 다 풀어지잖아요! 내가 속이 상해서 외쳤다. 너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캐시? 내가 너와 결혼 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나는 너와 결혼하겠다고 거짓말
한 적이 한 번도 없어. 난 나와 게임을 하고 있는 거였다고. 그가 목이 막히더니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더니 손을 내리고 애걸했다. 너를 사랑해. 하느님께서 진노할 일이지만, 널 사랑해. 너를 내 근처에 늘 두고 싶고, 내 아이를 원하기도 해. 너 지금 정말 로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거지? 내가 말했다. 그냥 여자의 게임이에요. 여자가 유일하게 할 수 있고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게임요. 그렇게 아리송하게 말하지 말고 무슨 생각인지 말해줘. 내 아내가 돌아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넌 내 인
생에서 언제나 자리를 차지하고... 당신의 인생에서라고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당신 인생의 언저리가 아니고요? 나의 말에 그의 목소리에서 겸손함이 느껴졌다. 캐시, 생각 좀 똑바로 해보자. 난 너를 사랑하고 내 아내도 사랑해. 때로는 그녀에게서 너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도 없어. 내가 말한 대로 그녀는 달라져서 돌아왔지. 이제 그녀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해졌어.어쩌면 더 젊어진 몸과 얼굴이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되돌려주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 때문에 그녀는 한결 다정해졌어. 이유가 뭐든
간에 나는 감사한 마음이 들어. 심지어 그녀가 정떨어지게 굴 때마저 나는 그녀를 사랑했어. 그녀가 미울 때면 다른 여자들을 찾는 것으로 응수를 해주려고 했지. 하지만 그때도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어. 우리가 계속 싸우는 한 가지 큰 문제가 그녀가 아이 갖기를 꺼린다는 점이었어. 심지어는 입양도 하지 않으려고 해. 물론 지금은 아기를 낳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고 말았어. 제발, 캐시. 여기 있어! 떠나지마! 내 아들에게, 아니면 딸에게, 아니면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영영 모르게 내 아이를 데리
고 가버리면 안 돼. 그의 말에 나는 단칼에 확실히 했다. 좋아요. 한 가지 조건을 달고 남을게요. 이혼하고 나와 결혼하는 거예요. 오로지 그래야만 당신이 항상 원하던 아이를 가질 수 있어요. 안 그러면 나는 가버릴 거예요. 그 말은 내 아이도 저 먼먼 곳으로 함께 데려간다는 뜻이에요. 당신에게 아들이 생겼는지 딸이 생겼는지 편지로나마 알려줄지도 모르죠. 안 그럴지도 모르고요. 어느 쪽이거나 일단 내가 떠나면, 당신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생각했다. 보라지, 마치
아내가 아이를 가지면 안 된다는 유언장 보충서가 유언에 들어 있지 않았다는 듯이 행동하네. 그녀를 보호하면서! 크리스와 마찬가지로 내내 알고 있었으면서도! 유언장을 작성한 장본인이 그였다.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벽난로 앞에 서서 선반을 붙잡더니, 이마를 가져다 대고 불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한 손은 등 뒤로 해서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그가 어찌나 혼란스러운 생각에 빠져 있는지, 그 생각이 빠져나와 내 마음을 만지고 그가 가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얼굴을 돌리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
았다. 무언가 금방 깨달았다는 듯이. 세상에! 캐시, 너 내내 계획했던 거구나, 그렇지? 넌 지금 이걸 손에 넣으려고 이곳에 온거야. 하지만 왜지? 왜 네가 해칠 사람으로 나를 고른 거냐고?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다고, 캐시. 내가 널 사랑한 거 말고 뭐가 더 있어? 그래, 섹스로 시작했고, 섹스로만 남기를 원했어.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것으로 자라나고 말았지. 난 너와 함께 있는 게 좋아. 그냥 앉아서 얘기하거나 숲을 함께 산책하는 게 좋아. 너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 네가 날 챙겨주는 모양, 지나치
다가 내 볼을 만지는 손길,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 내 목에 입을 맞추고, 잠에서 깨어 네 곁에 내가 있는 걸 보고 달콤하고 수줍게 미소짓는 모습이 좋아. 네가 놀음하고 있는 영악한 게임도 좋아하지. 언제나 추측하게 만들고, 그게 항상 재미있어. 한 사람 안에 열 명의 여자가 들어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너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하지만 아내를 버리고 너와 결혼할 수는 없어. 그녀에게는 내가 필요하니까! 내가 대꾸했다. 배우라도 되시지 그랬어요, 바트. 눈물이 다 날 지경이네요. 그가 버
럭했다. 빌어먹을, 왜 이렇게 가볍게 받아들이는 거야! 날 고문하면서 아주 주리를 트는구나! 너를 미워하게 만들어서 내 생애 최고의 나날을 망치려 들지마! 그말과 함께 그는 집을 박차고 나갔고, 나는 홀로 남겨졌다. 나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많이 했을까 후회스러웠다. 그가 날 필요로 한다면 남아 있을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엠마와 조리와 나는 리치먼드로 짧은 여행을 가서 크리스마스 쇼핑을 하면 아주 좋겠다는 데 의기투합했다. 조리는 자기가 기억하는 한 산타클로스를 본 적이 없었고, 그에게 오라고 팔을 벌리는 빨간 옷과 하얀 수염의 사내에게 다가가기를 몹시 무서워했다. 그는 탈리머스 백화점에서 산타의 무릎에 머뭇거리며 올라갔고, 못 믿겠다는 듯이 파란 눈을 반짝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동안에 나는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 바닥을 기어 다니기도 하고 별별 짓을 다 하면서 모든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다음으
로 우리는 내가 들어본 적 있는 옷가게를 찾아가, 내 기억을 바탕으로 스케치를 건넸다.(크리스마스때 폭스워스 홀에 입고 갈 옷) 나는 정확히 똑같은 어두운 초록색 벨벳을 골랐고. 스커트로는 그보다 밝은색의 시폰을 골랐다. 그리고 추가로 설명을 해줬다. 몸통 부분에는 라인스톤 색깔의 신발 끈을 달아주셔야해요. 그리고 하늘거리는 시폰이 드레스 단까지 미치게 해주세요. 조리와 엠마가 월트 디즈니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에 나는 머리카락을 잘라 스타일을 바꾸었다. 미용실에 가면 보통은 다듬는 정도
였지만, 이번엔 생애 최고로 짧게 쳐냈다. 생각했던 대로 만족스러웠다. 15년 전에 이 스타일은 어머니의 모습을 아름답게 돋보이게 해주었었다. 엄마! 조리가 소리를 질렀다. 조리의 목소리에 고뇌가 서려 있었다. 엄마! 엄마 머리카락이 어떻게 됐어? 우리 엄마처럼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조리가 울기 시작했다. 내 머리를 보고 놀란 것이었다. 맞다. 그것이 내 의도였다. 나는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나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 특별한 크리스마스에는 아니었다. 폭스워스가에 갇혀 있을때, 엄마가 바트와 춤
을 추던 장면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의 엄마 모습을 정확히 똑같이 베켜야 하는 크리스마스였다. 이제, 긴긴 세월 끝에 마침내 그녀가 입었던 것과 같은 드레스와 같은 헤어스타일, 더 젊은 그녀의 얼굴로 그녀의 집에서 내 방식대로 그녀와 맞대할 기회가 왔다. 여자 대 여자로. 그리고 둘 중에 최고가 승리하면 된다! 그녀는 곧 마흔여덟 살이 되고, 최근에 주름살 제거 수술을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아름답다는 건 나도 알았다. 하지만 그녀도 스물한 살이나 어린 딸과는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 초록색 드
레스를 입고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아무렴 나는 그녀의 예전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냈다. 남자들이 저항해낼 길이 없는 여자로. 나는 그녀의 힘과 아름다움과 그녀보다 열 배는 더 좋은 머리를 가졌다. 그녀가 무슨 수로 나를 이기겠는가? 작정하고 덤비는 나를!
크리스마스 사흘 전에 크리스에게 전화를 걸어 리치먼드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동네의 작은 상점에서는 구 할 수 없는 필수적인 물건 몇 가지를 까먹은 터
였다. 하지만 크리스는 딴 얘기를 했다. 캐시! 네가 바트 윈슬로를 포기하는 날이 오면 나를 다시 만나게 될거야. 하지만 그때까지 나는 네 곁에 갈 생각도 하지 않을 거야!
좋아! 나도 화르륵 맞받아쳤다. 거기 그냥 눌러 있어! 오빠 스스로 복수할 기회를 놓치고 있는거야! 엄마가 우리한테 어떻게 했는지 생각이나 하고 있어? 자기배로 낳은 자식에게 독약을 먹여 죽이고 죽이려 했다고! 그런데 오빠는 엄마를 용서해? 오빤 엄마하고 뭐가 다른데! 침대 빈대 한테나 콱 물려 죽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예전처럼 발레 수업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발표회 기간에는 항상 수업에 나갔다. 나의 어린 무용수들은 발레복을 입고 부모와 할머니, 할아버지와 친구들 앞에서 뽐내는데 신이 났다.<호두까지 인형> 의상을 입은 그들은 아주 귀여워 보였다. 조리도 두 가지 작은 역할, 눈송이와 사탕 요정을 맡았다.
내 생각에 단 한 번의 그리스마스이브 날, <호두까기 인형> 공연에 가족기리 참여해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황홀한 일은 없다. 그 재능있고 작은 아이들 가운데 한 명이
자기 자신의 아이라면 그보다 천배는 더 좋다. 조리는 네 살이 되기까지 52일을 남겨두고 있었다. 무대에서 열심히 춤을 추는 모습이 어찌나 아기답게 귀여운지 객석에
객석에서 되풀이해서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그가 솔로를 할 때면 청중이 일어나서 그를 응원해 주었다. 그를 위해 특별히 내가 안무한 솔로였다. 그중 최고는 우리 어머니를 발표회에 끌고 오라고 바트를 단단히 구워삶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왔다. 커튼 틈으로 내다보니, 맨 앞줄 가운데 바트와 그의 부인이 있었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그녀는 암울해 보였다. 말하자면 내가 어느 정도는 바트를 쥐고 흔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무용 선생에게 줄 어마어마하게 큰 장미 꽃다발과, 눈송이를 솔로로 공연하는 무용수에게 줄 거대한 상자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이게 뭘까? 조리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행복이 하늘을 튕기고 내려올 듯했다. 그것은 조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 5시도 되기 전에 조리는 일어나서 바트가 보낸 전기 기차를 가지고 놀았다. 거실 바닥 천지에 폴과 헤니와 크리스와 산타클로스가 아름답게 포장해서 보낸 선물들이 널려 있었다. 엠마는 집에서 만든 쿠키를 주었다. 조리는 득달같이 포장을 찢어 열었다. 엄마, 삼촌들이 없으면 외로울 줄 알았는데 외롭지 않아 즐거워.
조리는 외롭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외로웠다. 바트가 저쪽 집 그녀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기를 원했다. 약국에 간다든지 하는 핑계를 대고 나와서 조리를 슬쩍 보러 오기
를 기다렸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내가 바트의 일말이라도 본 것은 열두 송이의 붉은 장미를 동봉한 5센티미터 두께의 다이아몬드 팔찌가 전부였다. 카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랑해 발레리나.
혹시 그날 밤에 나만큼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옷을 차려입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면, 마리 앙투아네트밖에 없었으리라. 엠마는 평생이 걸리겠다고 투덜거렸다. 나는 잡지 표지에 클로즈업으로 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공을 들여 화장했다. 엠마가 아주 오래전에 내 어머니가 했던 모양으로 머리를 만져주었다. 내가 말했다. 웨이브를 넣어서 얼굴 뒤로 살짝 넘겨줘요, 엠마. 그리고 높게 들어 올려서 송이송이 만 다음 왕관 모양으로 만들고, 몇 가닥은 어깨로 흘러내리게 해줘요.
그녀가 일을 마쳤을 때, 나는 내가 열두 살 적 내 어머니와 거의 똑같은 모습을 거울 속에서 보고 숨이 멎었다. 이 헤어스타일을 하니 내 높은 광대뼈가 도드라졌다. 정말로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꿈처럼, 나는 벨벳 몸통에 시폰 스커트가 달린 초록색 드레스를 입었다. 절대로 유행에 뒤지는 법이 없는 모양의 드레스였다. 나는 거울 앞에서 남자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힘을 가진 내 어머니가 된 것처럼 느끼며 빙그르 돌았고, 엠마가 뒤에 서서 칭찬을 늘어놓았다. 향수까지 똑 같은 것을 샀다. 동양
의 정원 냄새가 깃든 사향 냄새, 구두는 10센티미터 힐이 달렸으며 은색 스트랩을 두른 것이었다. 거기에 은색 야회용 핸드백으로 짝을 맞추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녀가 찼던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 보석이 다였다. 보석도 곧 차게 될 것이었다. 운명이 오늘 밤 그녀로 하여금 초록색을 입지 않게 해주어야 했다. 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운명이 한 번쯤은 내 편도 들어주어야 했다. 나는 그때가 오늘 밤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오늘 밤에 나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뒤통수를 치고 타격을 가할 것이다. 그녀도 상
실의 고통을 맛보리라! 우리 아버지가 고속도로에서 죽던 날부터 시작된 긴긴 놀이의 결말을 크리스가 와서 즐기려고 하지 않다니, 애석한 일이었다. 나는 한 번 더 나 자신을 보며 경탄하고, 바트가 준 모피 숄을 들어 올리면서 휘청거리는 용기를 다시 그러모으고 나서, 모로 몸을 말고 누워 천사 같은 모습을 하고 자는 조리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몸을 숙여 그의 둥근 장밋빛 뺨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조리. 내가 속삭였다. 현관문 옆 탁자에 폴에게서 온 편지가 놓여 있었다.
'헤니가 아주 많이 아파. 너무 늦기 전에 네 계획을 포기하고 헤니를 보러 올 수 없다니 안타까운 일이구나. 행운을 빈다. 캐서린.'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쪽지를 옆으로 밀어놓고, 같은 봉투에 동봉한 경쾌한 빨간색의 종이에 쓰인 헤니의 쪽지를 집어 들었다. 관절염을 앓는 아픈 손마디 때문에 글씨가 삐뚤삐뚤했다.
'친애하는 요정 나라의 아가야, 헤니는 늙었어. 헤니는 지쳤어. 헤니는 우리 아들이 곁에 있어서 행복해.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너무 멀리 있어서 슬퍼. 내가 더 좋은 곳으로 가기 전에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인생을 행복하게 살게 해주는 단순한 비밀이야. 과거의 사랑들에는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사랑에 인사를 하기만 하면 돼. 주위를 둘러보고 누가 널 가장 필요로 하는지 보면 너는 잘못될 일이 없어. 과거에 너를 필요로 했던 사람은 잊어. 네가 편지에다가 네 어머니의 남편의 아이를 배 속에 가지고 있다고
썼지. 어머니의 남편이 설령 그녀와 헤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아기를 가진 일은 기뻐해. 한때 악한 짓을 했다고 해도 네 어머니를 용서해. 세상에 나쁘기만 한 사람은 없고, 그녀 자식들의 좋은 점은 틀림없이 그녀에게서 아주 많이 나왔을 거야. 과거를 용서하고 잊으면, 평화와 사랑이 네게 다시 찾아올 거고, 이번에는 떠나지 않고 머무를 거야. -이제 곧 하늘나라로 갈, 헤니가......
나는 가슴에 묵직한 슬픔을 느끼며 편지를 내려놓고 어깨를 으쓱했다.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나는 오래전에 이 길에 발을 들여놓았고 계속 따라왔으며, 올 일은 오고야 말 것이다. 바깥으로 나서면서 조리와 밤을 보낼 엠마에게 손을 흔드는데 바람이 불지 않는 게 참으로 이상했다. 나는 부츠 덧신으로 은색 구두를 감싸고 차로 향했다. 자연이 나에게 집중하면서 초조하게 긴장하고 있는 듯 고요했다. 솜이불처럼 부드러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잿빛을, 납빛을 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할머니의 눈과
참 비슷했다. 다시 마음을 다 잡고 시동을 걸고 폭스워스 홀로 출발했다. 난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바트에게 미친 듯이 화를 냈었다. 왜 그녀가 나를 초대하도록 닦달하지 않은 거죠? 그가 대꾸했다. 정말, 캐시, 그건 좀 과한 부탁 아니야? 아내 파티에 내 정부를 초대해서 아내를 욕보이라고? 난 바보일는지는 모르지만, 캐시, 그렇게까지 잔인한 사람은 아니야.
열두 살에 갇혀서 보낸 첫 크리스마스에 나는 크리스의 소년다운 가슴에 머리를 묻고서, 어른이 되고 싶다고 안타깝게 소망했다. 어머니처럼 굴곡이 선명하고, 얼굴은 그녀만큼 아름답고, 그녀처럼 눈부신 옷을 입고 싶었다. 그리고 가장 소망했던 것은 내 뜻대로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일부는 이루어졌다.
10시 조금 넘어서 나는 나무 열쇠로 폭스워스 홀의 뒷문을 열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들어갔다. 이미 많은 손님이 와 있었고, 아직도 더 오고 있었다. 오케스트라가 크리스마스 캐럴을 연주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음악에 너무도 감미롭게 홀린 나머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갔다. 다만 이번에는 뒤에서 나를 받쳐줄 사람 하나 없이 이곳에서 오로지 나 혼자였다. 필요하다면 재빨리 숨을 준비를 하며 어두운 곳만 골라 뒤 계단으로 올라가서, 중앙 원형 홀 근처로 가는 외로운 길로 이동했다. 그 옛날 크리스
마스 파티를 내려다보며 크리스와 내가 숨어 있던 괘짝 근처였다. 아래층에서 밝은 라메 천 드레스를 입은 아내 곁에 서 있는 바트 윈슬로가 보였다. 박력 있는 목소리는 다정했고, 도착하는 손님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악수를 하고 볼에 입을 맞추고 진심이 담긴 모습으로 상냥한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딸린 부속물처럼 보였다. 곧 자기 것이 될 이 거대한 저택에서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사람 같았다. 나는 혼자서 씁쓸하게 웃으며 우리 어머니의 웅장한 스위트룸으로 몰래 들어갔다. 그러고
는 곧장 지난날로 되돌아갔다. 아, 세상에나! 나는 비록 이제는 좀 더 낫고 정확한 언어를 동원 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 시절 어린 소녀가 느낀 즐거움, 놀라움, 당혹감이나 좌절감의 감탄사를 내뱉고야 말았다. 오늘 밤 나에게 좌절감은 없었다.오로지 합리화를 하겠다는 약한 느낌만 들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그녀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저기 봐, 저 찬란한 백조 침대가 여전히 있네, 작은 백조 침대가 여전히 발치에 있고, 모든 게 그대로 있는지 보려고 주위를 둘러보니, 벽에 붙어 있던 실크 벽
지가 달라져 있었다. 이제 벽은 딸깃빛 분홍색이 아니라 연자주색이었다. 바트가 입을 양복을 구겨지지 않게 걸어놓은 놋쇠 옷걸이. 그것도 처음보는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옷방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맨 아래 서랍을 열어 작은 버튼을 만졌다. 까다로운 잠금장치를 여는 숫자 버튼이었다. 그리고 참으로 기가 막히게도 그녀는 자기 생일을 여전히 비밀번호로 쓰고 있었다. 저런! 그녀는 사람을 참 잘 믿기도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앞 바닥에 벨벳 천을 두른 커다란 함이 놓여 있었다. 나는 크리스와 내가 바트
윈슬로를 처음 보았던 크리스마스 파티(폭스워스홀에 갇혀 있을때)에서 그녀가 달았던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를 달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으며, 바트 윈슬로를 얼마나 괘씸해했던가. 우리는 아버지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마음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엄마가 재혼하지 않기를, 다시는 결혼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꿈이라도 꾸는 듯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 보석을 달았다. 초록색 벨벳과 시폰 드레스와 이를 데 없이 잘 어울렸다. 거울들 들여다보며 내가 그때 그녀와 비슷
하게 생겼는지 살폈다. 나는 당시의 어머니보다는 몇 년 아래지만, 어쨋거나 그녀와 비슷했다. 아주 똑같지는 않았지만, 거의 그랬다. 그리고 남들에게는 충분히 그렇게 보일 법했다. 같은 나무에서 떨어진 이파리라고 해서 어디 완전히 똑같은 법이 있던가? 보석함을 금고에 도로 넣고, 서랍을 닫고 모든 것을 있던 그대로 놓아두었다. 몇만 달러는 족히 나가는, 내 것이 아닌 보옥이 이제 내게 달려 있는 것만 빼고는, 그러고는 한 번 더 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을 보니 10시 30분이었다. 아직 일렀다.
나는 자정에 보란 듯이 입장하고 싶었다. 신데렐라를 거꾸로 한다고나 할까.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조심을 기울여 북쪽 동으로 향하는 긴 복도를 살금살금 걸어갔고, 문이 잠긴 제일 끝 방에 도달했다. 나무 열쇠는 여전히 맞았다. 그러나 심장은 가슴 말고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했다. 너무도 빠르게, 너무도 격렬하고 큰 소리로 날뛰었고, 맥박은 경기가 난 듯이 고동쳤다. 차분하고 침착하게 모든 일을 제대로 처리하고, 우리를 참으로 보기 좋게 파괴한 이 어마어마한 집에 주눅이 들지 말아야했다.
더블 침대 두 개가 있는 방에 들어섰을때, 나는 내 어린 시절로 다시 들어섰다. 금색으로 퀼트 바느질이 된 새틴 침대보가 여전히 주름하나 잡히지 않고 침대에 깔려 있었다. 10인치짜리 텔레비젼도 구석에 여전히 놓여 있었다. 사기로 만든 사람들과 집에 맞는 크기로 제작된 골동품 가구들이 들어 있는 인혀의 집(캐리의 장난감)이 캐리의 손길을 받아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가 다락방에서 가지고 내려왔던 오래된 흔들의자도 그대로였다. 아, 마치 시간이 정지해 있고 우리도 떠나지 않고 그
대로 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심지어 지옥도마저 벽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걸작을 복제한 세 점의 소름 끼치는 그림. 아, 하느님! 이 방이 나를 이토록이나, 이토록이나 속으로 찢어놓을 줄은 몰랐다. 지금 이 순간에는 우는 것도 사치다. 코리와 캐리의 유령이 획획 스치고 있었다. 고작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웃고, 울고, 밖에 나가 햇볕을 쬐고 싶어 하던 아이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니 트럭(장난감)을 상상의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엔젤레스로 밀고 가는 것밖에 없었다. 온 방과 가구 아래를 가로지르는
기차 선로가 있었다. 아, 그 석탄을 나르던 기차와 기관차는 다 어디로 간 걸까? 나는 내 작은 핸드백에서 티슈를 꺼내어 어느새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몸을 기울여 인형의 집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사기로 만든 하녀들이 여전히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고, 집사는 앞문에 서서 두필의 말이 이끄는 마차를 타고 온 손님들을 여전히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참, 아기 방을 보니 요람이 그대로 있었다. 없어졌던 요람! 우리는 몇 주 동안이나 요람을 찾아 헤맸다. 그동안 할머니가 그 사실을 알아내고서 캐리
에게 벌을 줄까 봐 두려워했었다. 그런데 여기 원래 있던 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아기는 그 안에 없다. 앞쪽 응접실에 있던 부모도 없다. 파킨스 씨 부부와 그들의 아가 클라라는 지금은 내 수중에 있고 다시는 인형의 집에 살지 않을 것이다. 요람을 훔쳐 간 장본인이 할머니였을까? 그렇게 해서 그게 없어진 걸 알아챈 척하고 캐리에게 어디에 있는지 물은 뒤 대답을 내놓을 길 없는 캐리를 벌하려고 했던 걸까? 그랬다면 제 몸을 지키고 싶어 하는 두려움 따위는 없이 자동적으로 쌍둥이 누나를 지키러 달려
갔을 코리도 함께 벌을 받았으리라. 그녀는 그토록 야비하고 잔인한 짓을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왜 그녀는 쌍둥이에게 손을 대지 않았고, 자기가 해오던 짓을 끝내 하지 않았을까? 혼자서 씁쓸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끝가지 자기 하던 대로 했다. 채찍질만 안 했다 뿐이지, 더 대단한 짓, 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던가. 독. 가루 설탕을 뿌린 네 개의 도넛에 든 비소. 그때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나는 깜짝 놀랐다. 물론 내 상상이었다. 그러고는 참지 못하고 벽장 쪽으로 가
서, 제일 안쪽 구석에 있는 높다랗고 좁은 문을 열고 좁고 어두은 계단을 올라갔다. 백만 번도 더 이 계단을 올라갔다. 촛불이나 손전등 없이 이 어둠속을 백만 번 오르락내리락했다. 어두컴컴하고 으스스하고 거대한 다락방에 들어서고 난 다음에야 크리스와 내가 초와 성냥을 숨겨두었던 곳을 더듬더듬 찾았다. 여전히 있었다. 이곳은 정말이지 시간이 정지해 있는 곳이었다. 우리에게는 촛대가 여러 개 있었다. 전부 다 작은 손잡이가 달려 있는 백랍 촛대였다. 우리는 궤짝에서 촛대들과 더불어 엉성하게 만든
뭉툭하고 짤막한 초들이 담긴 상자들을 찾아냈었다. 우리는 이 초들을 집에서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불을 붙이면 정말로 고약하고 오래된 냄새가 났었다. 숨이 막혔다! 아! 달라진 게 없었다! 종이꽃들이 여전히 매달려 있었고, 모빌이 바람받이에서 흔들리고 있었으며, 거대한 꽃이 아직도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오로지 색깔들만이 구분이 잘 가지 않는 잿빛으로 바래 있었다. 유령 꽃들, 한가운데 풀로 붙였던 반짝이는 떨어졌고, 데이지 몇몇 송이에만 반짝이 또는 반짝이는 돌이 가운데 박혀 있었다.
캐리의 보라색 지렁이도 이제 역시 색이 다 바랬다. 코리의 꼬불꼬불한 달팽이는 예전처럼 밝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물놀이 공 같은 모양이 아니라, 뜨뜻미지근하니 반쯤 썩어서 문드러진 오렌지처럼 보였다. 크리스와 내가 빨간색 페인트로 칠한 경고 표지판도 벽에 그대로 있었다. 그네도 서까래에 매달려 있었다. 저쪽 전축 옆으로는 발레 연습을 하라고 크리스가 만들어서 못으로 박아주었던 바가 있었다. 작아진 내 발레 의상들까지 못에 걸려 축 늘어져 있었다. 짝을 맞춘 여남은 벌의 레오타드와 닮은 토슈
즈, 모두 색이 바래고 먼지가 쌓여서 썩어가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꼼짝없이 꾸게 된 불행한 꿈에서처럼 나는 깜빡거리는 촛불을 들고 정처 없는 걸음으로 저 먼 교실로 향했다. 주변이 깨어나며 하품을 하고 속닥거리기 시작하고, 유령들이 들썩이고 기억과 귀신들이 나를 따라왔다. 아니야,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긴 시폰 스커트가 날리고 서걱거리는 소리일 뿐이야.....그뿐이야. 점이 박힌 흔들 목마가 어렴풋이 나타났다. 무섭고 위협적인 그 모습에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누르려고 손이 목으로 올라갔다. 다
낡은 목마가 보이지 않는 손에 흔들거리는 듯 보였다. 당시 이곳을 떠날때 내가 미래에 이곳에 올 사람들에게 남겨둔 수수께끼의 작별인사가 적힌 칠판으로 눈길이 옮겨 갔다.
'우리들, 이 다락방에 살았노라, 크리스토퍼, 코리, 캐리, 그리고 나, 이제는 셋밖에 남지 않았다'
코리가 쓰던 작은 책상 앞에 앉아서 애써 다리를 끼워 넣었다. 자기가 어디에 묻혀 있을지 말해줄 코리의 영혼을 불러내기 위해 깊은 몽상에 빠지고 싶었다.
앉아서 기다리는데 바깥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여세를 몰아 눈을 휘날리며 울부짖었다. 눈보라가 또다시 온 힘을 다해 불어오고 있었다.폭풍우가 윙윙대다가 촛불을 꺼버렸다! 어둠이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냈다. 달려서 이곳을 나가야 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되기 전에 달려야 했다. 속력을 다해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려야 했다.
다음 한 시간 동안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으며 보냈다. 할아버지의 커다란 괘종시계가 12시를 알리는 종을 치기 시작했을 때 나는 2층 발코니 정중앙에 서 있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겠다고 엄청난 쇼를 벌이지는 않았다. 반짝이는 보석으로 데워진 내 몸뚱아리로 그저 서 있었을 뿐이다. 목이 아주 높이 올라간 라메 천 진홍색 드레스에 목에 딱 맞는 육중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찬 어머니가 몸을 약간 돌렸다. 엄격한 앞부분을 상쇄할 셈이었는지, 드레스 등 뒤는 엉덩이 골이 드러나다시피 훤히 파여 있었다.
머리는 내가 보았던 그녀의 머리 중에 가장 짧았고, 외모를 돋보이게 부풀려 있었다. 이 거리에서 보니 아주 젊고 아름다우며, 그녀 나이에는 근처도 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아.....12시를 알리는 마지막 종이 울렸다.....
무슨 여섯 번째 감각, 육감이 발동했는지, 그녀가 천천히 머리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눈이 커지고 어
두워지더니, 칵테일 잔을 잡은 손을 벌벌 떨었다. 술이 찰랑찰랑 흘러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못 박힌 듯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바트도 그녀의 시선이 간 곳을 따라갔다. 그가 유령이라도 봤다는 듯이 얼이 빠졌다. 여자 주인과 남자 주인 두 명 다 이제 혼이 모두 빠져버렸고, 손님 한 명 한 명도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틀림없이 산타클로스를 보리라고 기대했겠지만, 그들이 본 건 오로지 나였다. 수년 전 한때 엄마의 모습인 나, 같은 드레스를 입고 수많은 사람 앞에 나선 나였
다. 그 중 상당수가 내가 열두 살 때 열린 그 크리스마스 파티에 왔던 사람들일 것임이 확실했다. 몇몇은 알아볼 수도 있었다. 나이가 좀 들기는 했지만, 나는 그들을 알아보았다. 아, 그들이 이곳에 와준 기쁨이라니! 내 승리의 순간이었다! 나는 발레리나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움직이며, 내 배우로서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역할을 연기할 셈이었다. 손님들이 시간이 거꾸로 돌아간 장면을 보고 완전히 넋이 나가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이에, 나는 핼쓱해지는 엄마를 보며 쾌재를 불렀다. 나에게서 엄마로
건너뛰었다가 내게로 되돌아오는 바트의 눈이 더 커진 걸 보았을 때는 환희가 일었다. 음악마저 멈추어서 쥐 죽은 듯 고요한 가운데, 양편에 굽이치며 놓인 계단 중 왼쪽 계단으로 천천히 내려올 적에 나는 내가 오로라에게 죽음의 저주를 내리는 마녀 요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으로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오로라가 100년간의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오로라의 왕자를 빼앗아 가는 라일락 요정을 춤추었다(나는 어머니의 딸로서 나 자신을 연출하지 않았고, 얼마나 빨리 그녀를 파괴할지에 집중했다. 나의 등장
을 그녀의 딸이 아니라 연극으로 꾸민 점에서 나는 영리했다. 현실, 그러니까 환상이 아니라 피가 쏟아질 수 있는 현실을 다루면서 무대극으로 꾸며 본 것이다).
나는 보석으로 반짝이는 손가락을 계단 난간을 따라 우아하게 움직이며 스텝을 밟눈 순간순간마다 시폰 스커트 자락이 펄럭이는 것을 느꼈고, 이제 내 어머니와 바트가 함께 바짝 붙어 있는 곳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는 온몸을 떨고 있었지만, 애써 냉정을 유지했다. 푸른색 드레스덴 눈 속에 깜박거리고 있는 공황이 보였다. 바닥까지 계
단 두 개를 남겨놓고 서서, 나는 친절하게도 그녀에게 가장 우아한 미소를 선물로 주었다. 나는 방 안에 있는 누구보다도 키가 커야 했기 때문에 계단을 다 내려오지 않았다. 캐리가 신던 10센티미터짜리 굽과 같은 높이의 은색 굽을 신고 있는 나를 모든 사람이 올려다보아야 했다. 나는 같은 높이에 섰을 때 내 어머니와 눈과 눈을 맞추기 위해 이 굽을 선택했다. 그래야 그녀의 경악을 더 잘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그녀의 불편한 기분을 더 잘 들여다보려고. 그녀의 철저한 붕괴를 더 잘 보려고!
메리크리스마스!
나는 커다랗고 분명한 목소리로 청중에게 외쳤다. 내 목소리가 전령의 나팔 소리처럼 울려 퍼졌고, 여러 방에서 흩어져 있던 다른 사람들도 끌어냈다. 수십 명은 되는 무리는 내 목소리가 아니라 쥐 새끼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침묵에 이끌려 나온 듯싶었다. 바트 윈슬로씨. 내가 교태를 부리며 그를 불렀다. 와서 나와 춤을 춰요. 15년 전에 내
어머니와 춤을 추었던 것과 똑같이 말이에요. 내가 열두 살이었고 저 위에 숨어 살았고, 그녀가 지금 내가 입은 것과 똑같은 드레스를 입었을 때와 똑같이. 바트는 눈에 보이도록 흠칫했다. 그의 검은 눈이 감전이라도 된 듯한 충격에 더 어두워졌지만, 그는 내 어머니 곁을 떠나기를 거부했다! 하는 수 없이 다음 단계로 옮겨 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서 있던 모든 사람이 숨죽여 긴장감을 느끼며 더 폭발력 있는 폭로를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동안에 나는 그들이 원하던 것을 주었다. 제 소개를 해야겠군요! 아주 높
은 음조로 말을 하는 내 목소리가 멀리까지 잘 퍼져나갔다. 저는 캐서린 리 폭스워스, 바살러뮤 윈슬로 여사의 장녀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대부분이 어머니가 제 아버지와 첫 결혼을 했던 건 기억하시겠지요. 크리스토퍼 폭스워스(캐시 아버지) 말입니다. 그분이 내 어머니의 이복 삼촌, 그러니까 맬컴 닐 폭스워스의 남동생이었다는 것도 기억하시겠지요. 그분은 유일한 딸, 유일한 상속자인 그녀의 상속 자격을 박탈했습니다. 자신의 이복형제와 결혼하는 불경한 만용을 저질렀다는 이유로요. 그뿐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이름이 역시 크리스토퍼인 오빠가 한 명 있습니다. 그는 이제 의사가 되었어요. 또 한때 저보다 일곱 살이 어린 남동생과 여동생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코리와 캐리는 이제 죽고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애들은... 나는 속이 울컥해서 말이 이어지지 않아 끊었다가 다시 시작했다. 15년 전 그 크리스마스 파티 때 오빠와 저는 저 발코니의 괘짝에 숨어서 파티를 구경했습니다. 그동안에 쌍둥이는 북쪽 동 가장 끝에 있는 방에서 잠들어 있었지요. 우리의 놀이터는 다락방이었어요. 그리고 아래층으로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다락방의 쥐들, 일단 돈이 끼어들고 나자 불청객이고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되고 말았어요. 모든 얘기를 온갖 사소한 세부까지 큰 소리로 다 말하려고 하는데, 바트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브라보 캐시! 그가 외쳤다. 캐시, 당신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군요! 대단해요. 그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매력이 뚝뚝 흐르는 미소를 짓더니, 손님들에게 몸을 돌렸다. 손님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는 고사하고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도 몰라서 갈
팡질팡하는 듯 해보였다. 신사 숙녀 여러분. 캐서린 달을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이분이 남편인 줄리언 마르케 씨와 무대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많은 분들이 보셨을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방금 목격하셨듯이 이 분은 재능이 상당한 배우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있는 캐시는 제 아내와 먼 친척뻘이 됩니다. 닮은 데가 보인다면 그것으로 설명이 되겠죠. 실은 줄리언 마르케 부인은 이제 우리의 이웃이 되었습니다. 아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제 아내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서, 우리끼리 이 소동을 좀 꾸며
본 겁니다. 우리의 작은 농담으로 파티에 생기를 불어넣고 색다른 느낌을 내보자고 했던 겁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 마자 내 팔뚝을 무자비하게 붙잡더니 내 손을 잡고, 다른 손은 내 허리에 올리고서 춤을 추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자, 캐시, 근사한 연극 공연을 마친 후니 분명히 당신의 춤 실력을 뽐내고 싶겠지요?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하자 그가 나를 강제로 춤추게 했다! 어머니가 어떤 친구에게 기대어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너무도 창백한 나머지 화장 자국이 무슨 격노한 얼룩처럼 보였다. 그
런 와중에도 그녀는 자기 남편 품에 있는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뻔뻔한 계집애 같으니! 바트가 내게 쉭쉭거렸다. 어디 감히 여기까지 와서 그런 깜짝쇼를 벌일 생각을 했지? 나는 널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나는 기다란 발톱을 세우는 비열한 여자는 혐오한다고. 네가 내 아내를 망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이런 바보 같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네가 이렇게 많은 거짓말을 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되받았다. 바보는 당신이에요. 바트. 나는 속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지만 차분하게 말했
다. 제 모습을 봐요. 그녀가 이런 드레스를 입었는지 내가 무슨 수로 알았겠어요? 입은 모습을 직접 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알았을까요? 내 오빠인 크리스가 2층에서 당신과 내 어머니 두 사람이 했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듣지 않았으면, 당신이 백조 침대가 있는 그녀의 방을 보러 그녀와 함께 들어간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가 내 눈을 마주 보았다. 그는 너무도 기이하게, 너무도 멀고 낯설게 보였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래요, 내 사랑 바트, 나는 당신 아내의 딸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다녔던 로펌이 당신의 아
내가 첫 번째 결혼에서 네 명의 아이를 두었다는 사실을 알면, 당신과 그녀가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도 알아요. 그 모든 돈. 당신들이 했던 그 모든 투자. 당신들이 돈으로 산 그 모든 것을 빼앗기겠죠. 아, 측은해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요. 우리는 계속 춤을 추었고, 그의 볼과 몇 센티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의 입술에는 미소가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네가 입고 있는 드레스, 내가 이집에 처음 파티를 하러 왔을 때 그녀가 입었던 것과 똑같은 걸 어떻게 찾아낸 거지? 나는 짐짓 즐거운 척
하며 웃었다. 친애하는 바트, 당신은 참으로 바보인가 봐요. 어떻게 알았을 것 같아요? 그녀가 입고 있는 걸 봤으니까요. 드레스가 얼마나 예쁜지 보라고 우리가 살던 방에 가져왔었다고요.(갇혀 있을때 엄마가 애들방에 드레스를 입고 온적이 있었다) 나는 그녀 몸의 그 모든 굴곡, 크리스가 감탄에 차서 그녀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시샘을 느꼈어요. 그녀는 지금 나와 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죠. 그리고 보석은 그녀의 옷방 맨 아래 서랍에서 가져온 거라는 말씀이에요. 내 말에 그는 거짓말이야! 라고 되받았
다.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이제 목소리에 의구심이 서리고 있었다. 번호를 알아요. 내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자기 생일을 번호로 썼죠. 내가 열두 살 때 그녀가 해준 얘기예요. 그녀는 내 어머니예요. 우리를 그 방에 가둬놓고,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길 기다렸죠. 그래야 유산을 상속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를 왜 그 크고 어두운 비밀로 묶어놔야 했는지는 당신도 알고 있어요. 바트! 당신이 그 유언장을 작성한 장본인이니까요. 안 그래요? 과거로 되돌아가서 어떤 날 밤을 떠올려봐요. 당신이 그녀의
웅장한 방에 잠들어 있고, 짧은 파란색 잠옷을 입은 어떤 소녀가 몰래 들어와 당신에게 입을 맞추는 꿈을 꾸었던 그때로요. 당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었어요. 바트. 제가 당신에게 입을 맞추었어요. 그때 나는 열다섯 살이었고, 돈을 훔치려고 당신들 방에 몰래 숨어 들어갔어요. 여기를 탈출하면 돈이 있어야 했거든요. 당신 방에서 현금이 사라지곤 했던거 기억해요? 당신과 그녀는 하인들이 훔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돈을 훔치고 있었던 사람은 제 오빠 크리스였어요. 그리고 저도 딱 한 번 훔치러 갔어
요.....그나마도 당신이 있어서 겁이 나는 바람에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지만요. 아니...아니야!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야! 아내는 자기 친 자식들한테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럴까요? 그녀는 정말로 그런 짓을 저질렀답니다. 발코니 난간 근처에 있는 그 큰 궤에는 철망이 달려 있죠. 크리스와 난 그 망을 통해 충분히 잘 볼 수 있었어
요. 출장요리사들이 크레이프를 내놓는 걸 봤고,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웨이터들을 봤고, 샴페인을 뿜던 분수를 봤어요. 펀치를 담은 커다란 은그릇도 두 개나 있었죠. 크리스와 난 그 모든 맛있는 음식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저 아래 있는 걸 맛보고 싶어 침을 흘렸어요. 우리가 먹는 음식은 너무도 형편없었어요. 항상 차갑거나 미지근했죠. 쌍둥이는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도 않았어요. 그녀가 쉬지 않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왔다 갔다 하던 추수감사절 저녁식사 자리에 당신도 있었나요? 그
때가 왜 그랬는지 알고 싶어요? 집사 존이 식료품 저장실을 비울 때마다 음식을 담은 쟁반을 우리에게 올려다 줄 준비를 하느라 그런 거예요.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 보였다. 나는 말을 계속 이었다. 그래요, 바트. 당신이 결혼한 여자에게는 3년하고 거의 5개월을 가두어 숨긴 자식 네 명이 있었어요. 우리의 놀이터는 다락방에 있었어요. 여름에 다락방에서 한 번이라도 놀아본 적 있어요? 겨울에는요? 즐거웠을 것 같아요? 노인이 죽기를, 그래서 우리의 삶이 시작되
기를 한 해 한 해 기다리던 우리의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어요? 그녀에게 자기 속으로 낳은 우리보다 돈이 우선이었던 걸 알고 나서 겪었던 우리의 상처를 짐작이나 하겠어요? 그리고 쌍둥이, 내 동생들은 키가 크지 않았어요. 작은 몸이 좀체 자라지 않았고, 눈만 너무도 커지고, 그 눈은 귀신에 씐 것처럼 변했어요. 그리고 그녀는 우리 방에 오면 쌍둥이는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그들의 건강이 좋지 않은 걸 알아보지 못한 척했다고요! 캐시, 제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그만둬! 그녀를 증오하게 만들지
마! 왜 증오하지 않아요? 그녀는 증오받아야 마땅해요. 그때 어머니가 벽에 기대어서서 곧 게워내기라도 할 것처럼 속이 좋지 않아 보이는 모습을 보며 내가 말을 계속했다. 한번은 백조 침대에 누워본 적이 있어요. 발치에 작은 백조 침대가 있죠. 협탁 서랍에는 섹스에 관한 책이 있었어요.< 나만의 자수를 만들고 디자인하는 법>이었나 뭔가 하던 책 커버아래 감춰져 있던 책이었어요. 나만의 자수 디자인을 만드는 법! 이라며 그가 정정했다. 계속 꼴 보기 싫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도 내 어머니 못지않게
속이 불편하고 창백해보였다. 흥, 다 지어낸 얘기야. 그가 조금도 정직하게 들리지 않는 야릇한 말투로 말했다. 캐시, 넌 나를 원하기 때문에 그녀를 증오하고, 나를 속여 넘기고 그녀를 파괴하려고 일을 꾸미는 거야. 내말을 부정하겠다는 듯이 말하는 그에게 나는 여유있게 그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며 역시 살짝 웃었다.
그럼 더 확인을 시켜드릴게요. 우리의 외할머니, 코바느질 한 옷깃이 달린 회색 테피터 천 드레스만 입고, 열일곱 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브로치를 단 한 번도 떼지 않았
던 할머니요. 매일 아주 이른 아침, 6시 반도 되기 전에 그녀는 음식과 우유를 소풍 바구니에 담아 가져왔어요. 처음에는 잘 먹여주는가 싶더니, 점점 열이 받치는지 우리의 식사는 갈수록 나빠졌어요. 땅콩버터와 잼만 바른 샌드위치에 튀긴 닭이나 감자 샐러드가 가끔 오는 정도까지 갔죠. 그녀는 우리가 살면서 지켜야 할 규칙이 나열된 긴 목록을 우리에게 주었어요. 커튼을 열어서 방에 빛을 들이면 안 된다는 것도 규칙에 포함되어 있었어요. 몇 해를, 우리는 햇볕이 들지 않는 어둑어둑한 방에서 살았어요. 인
생이 얼마나 음울해질 수 있는지 알려면, 온 사방이 다 닫히고 빛도 없이 살면서 방치당하고, 아무도 우릴 찾지 않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기분을 느껴보면 돼요. 그리고 아주 엄격하게 준수해야 할 규칙이 또 있었어요. 우리는 서로 쳐다보면 안 되었어요. 특히 다른 성별끼리는요. 아, 세상에! 그가 탄식을 내 뱉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 다운 얘기네. 갇혀서 지낸 기간이 3년이 넘는다고? 3년하고 거의 다섯 달요. 당신이 보기에 긴 시간 같다면,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 둘과, 열두 살짜리와 열네 살짜리에
게는 어땠겠어요? 그때는 5분이 다섯 시간처럼 , 나날이 몇 달처럼, 몇 달이 몇 년처럼 흘러갔어요. 모든 면을 요모조모 따져보는 변호사 특유의 사고로 그는 내 이야기가 사실인지 재보며 마음속에서 의구심을 놓고 싸우고 있었다. 캐시, 정직하게 말해줘. 완전히 정직하게, 너에게는 형제 두 명과 여동생 한 명이 있었다, 그리고 나도 이곳에 있었던 그 모든 시간 동안에 갇혀서 살았다는 얘기야? 처음에는 어머니를, 어머니가 하는 모든 얘기를 믿었어요. 우리는 그녀를 사랑하고 믿었으니까요. 그녀는 우리의 유
일한 희망이고 구원이었어요. 그녀가 할아버지에게서 그 모든 돈을 물려받기를 우리도 원했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위층에 머물기로 우리도 동의 했어요. 폭스워스 홀에 살러 왔을 때 우리가 숨어 지내야 한다는 설명을 어머니께서는 빼먹으셨지만 말이에요. 처음에는 하루나 그쯤 될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 하루가 계속되고 또 계속됐죠.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때웠어요. 우린 정말 많이 놀았고, 엄청나게 잠을 잤어요. 몸은 말라가고 반쯤 병이 들고 영양실조에 걸렸죠. 그리고 당신과 우리 어머니가
신혼여행으로 유럽을 돌고 있을 때는 2주 동안 굶겨졌어요. 그러고는 당신들은 당신 누나를 방문하러 버몬트 주에 갔지요. 그곳에서 어머니가 메이플 슈거 사탕 꾸러미를 사 왔어요. 하지만 그때 우리는 비소와 섞은 가루 설탕을 뿌린 도넛을 이미 먹고 있던 때였지요. 그는 끔찍한 분노에 차서 냉혹하고도 맹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녀가 버몬트에서 그런 사탕 꾸러미를 산 건 맞아. 하지만 캐시! 네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나는 내 아내가 제 자식들에게 독을 먹이는 짓을 꾸밀 사람이라고는 절
대로 믿을 수가 없어! 그가 경멸이 담긴 눈으로 나를 갈퀴처럼 훑더니, 내 얼굴을 다시 보았다. 그래, 넌 그녀와 정말로 닮기는 했구나! 그녀의 딸이라고 해도 믿겠어. 그건 인정하지! 하지만 코린이 제 친자식을 죽이려 한 사람이라고 하다니, 그건 믿을 수 없어! 나는 그를 억지로 밀어내고 몸을 홱 돌렸다. 다들 들어보세요! 내가 외쳤다. 나는 코린 폭스워스 윈슬로의 딸입니다! 그녀는 북쪽 동 제일 끝에 있는 방에다 네 명의 친자식을 가두었습니다. 우리의 외할머니가 계획을 꾸몄고, 우리더러 놀라고 다락방을
내주었습니다. 우리는 종이꽃을 만들어 그 방을 장식했어요. 쌍둥이 동생들이 그곳이 예쁜 곳이라고 생각하기를 바랐어요. 어머니가 유산을 상속할 수 있게 그렇게 숨어서 지냈어요. 어머니는 우리에게 숨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숨어 살지 않으면, 외할아버지가 절대 그녀를 유언장에 넣어주지 않을 거라면서요. 할아버지가 자기 이복동생과 결혼했다고 그녀를 얼마나 혐오했는지는 다들 아시겠죠. 어머니는 2층에 살면서 다락방 쥐들처럼 조용히 지내달라고 우리를 설득했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말
을 지킬 것이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 우리를 내보내줄 거라고 믿고 따르면서 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않았어요! 우리를 내보내주지 않았어요! 그분이 돌아가시고 땅에 묻힌 지 아홉 달이 지나도록 우리를 그냥 고통 받게 내버려두었어요! 쏟아낼 게 더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꽥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 그녀는 휘청거리며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장님이라도 된 듯 팔을 앞으로 뻗고 있었다. 거짓말이야! 그녀가 외쳤다. 당신은 내 평생 본적이 없는 사람이야! 내 집에서 나가! 경찰 불
러서 끌어내기 전에 당장 썩 나가! 나가서 이곳에는 얼씬도 하지 마! 이제 모든 사람이 내가 아니라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침착 그 자체이며 오만의 상징인 그녀가 이성을 잃고 떨었고, 내 얼굴에서 눈알이라도 긁어내고 싶은 마음에 얼굴이 시퍼레져 있었다! 그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그녀를 믿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내 모습이 바로 그녀이었던 마당에 누가 그녀의 말을 믿겠는가. 그리고 나는 많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바트가 내곁을 떠나 아내에게 가서 그녀의 귀에 뭐
라고 소곤거렸다. 그는 위로하듯이 그녀에게 팔을 두르고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절박해서 파리해지고 벌벌 떠는 손으로 무기력하게 그를 붙들고서, 짙은 푸른 눈에 닭똥 같은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그에게 도움을 애원하고 있었다. 나와 같은, 크리스와 같은, 쌍둥이와 같은 푸른눈으로. 바트,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라더니, 바트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멋진 공연을 펼쳐주신 데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캐시. 저와 함께 서재로 가십시다. 공연료를 지불해드리죠. 그는 무리 지어 있
는 손님들을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 아내가 몸이 안 좋습니다. 제가 이 작은 장난을 저지른 게 실수군요. 이런 쇼를 계획할 생각을 하다니, 제 불찰입니다. 그러니 부디 저희를 용서해주시고 파티를 계속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알아서들 즐겁게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음식도 드시고 술도 마시고 즐겁게 계세요. 그리고 계시고 싶을때까지 계셔도 좋습니다. 캐서린 달 양에게 여러분을 위해 쟁여둔 뜻밖의 즐거움이 또 있을지 모르죠. 나는 그때 그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미웠다!
사람들이 주변을 빙빙 맴돌며 나와 바트를 번갈아 보는 사이에, 그는 어머니를 부축해서 서재로 갔다. 그녀는 예전보다 몸집이 불었지만, 그의 품 안에서는 깃털 같았다. 바트는 어깨 너머로 나를 힐끗 보더니 머리를 움직여 따라오라는 표시를 했다. 나는 따라갔다.
나는 크리스가 이곳에 나와 함께 있어주기를 바랐다. 그는 그래야 했다. 나 혼자서만 진실을 가지고 그녀와 대면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나는 이상하리 만치 외로웠고, 바
트는 결국에는 내가 아니라 그녀를 믿을 것이라는 듯 방어적으로 나왔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어떤 증거를 준다고 해도 그녀를 믿을 듯했다. 증거라면 숱하게 있었다. 다락방에 있는 꽃들과 달팽이, 지렁이, 칠판에 내가 적은 수수께끼같은 메시지, 무엇보다도 그 나무 열쇠를 보여줄 수 있었다. 바트가 서재로 들어가서 가죽 의자에 내 어머니를 조심스럽게 앉혔다. 그는 들어서는 나에게 쌀쌀맞게 지시를 내렸다. 들어오면서 문 좀 닫아줄 수 있겠어? 그제야 서재에 누가 또 있는지 보였다! 할머니가 자신의 남
편이 썼던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휠체어가 같다는 걸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느냐마는, 이것은 특수 제작된 휠체어였고 보통의 휠체어보다 훨씬 좋은 것이었다. 그녀는 병원 환자복 위에 회색이 감도는 푸른색 가운을 입고, 다리 위에는 담요를 덮고 있었다. 휠체어는 벽난로 근처에 있어서 활활 타오르는 통나무의 열기가 그녀를 따뜻하게 해주고 있었다.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녀의 대머리가 빛났다. 그녀의 돌덩이같은 잿빛 눈이 악랄하게 빛났다. 간호사가 함께 있었다. 그가 간호사를 밖으로 내 보냈다.
방 안을 걷는 바트는 폭발 직전처럼 보였고 그의 진노는 나에게만이 아니라 아내에게도 향해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좋아, 해치워버립시다. 모든 걸 다. 코린, 당신에게 비밀이, 아주 큰 비밀이 있다는 의심은 항상 들었어.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많이 들었지만, 당신이 다락방에 당신 자식 네 명을 숨겨두고 있다는 생각은 뇌리에 단 한 번이라도 스친 적조차 없지. 왜? 왜 나한테 와서 진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지?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고 무정할 수가, 그토록 잔인하고 비정하게
자식 네 명을 가둬두고 비소로 죽일 생각을 할 수가 있었지? 갈색 가죽 의자에 흐물흐물하게 늘어진 어머니가 눈을 감았다. 무덤덤한 목소리로 묻는 그녀는 피라고는 다 빠져나간 것처럼 파리해 보였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아니라 저 여자를 믿겠다는 거네. 아무리 손에 넣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해도 내가 누구에게라도 독을 먹일 사람이 아니란 거 당신 알잖아. 내게 아이가 한 명도 없다는 것도 알고! 바트가 그녀가 아닌 나를 믿는다는 데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그가 정말로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
다운 요령을 피우고 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무방비 상태의 그녀를 공격해서 진실에 다가가겠다는 전략이 아닐까? 하지만 그 방법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통 할 수가 없었다. 너무도 오랜 세월을 스스로 훈련을 해왔기에 누구에게라도 갑작스럽게 뒷덜미가 잡힐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서서, 더없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바트에게 코리 얘기를 해보시지요? 해보라고요. 당신과 당신의 어머니가 밤에 우리 방에 와서 코리를 초록색 담요로 감싸고, 우리한
테 병원에 데려간다고 말했죠. 그리고 다음 날 와서 그가 폐렴으로 죽었다고 얘기 했던 거, 바트에게 말해봐요.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코리가 왜 죽었는지 얘기해 봐요! 어서! 크리스가 아래층으로 몰래 내려갔다가 집사 존 에이머스 잭슨이 할머니가 했다는 얘기를 웬 하녀에게 하는 걸 엿들었어요. 작은 생쥐들을 죽이려고 비소를 갖고 올라간다고 했다고요. 우리가 바로 그 설탕 바른 도넛을 먹은 작은 생쥐들이었다고요. 어머니! 그리고 우리는 도넛에 독이 들어 있다는 걸 증명해냈어요. 엄마가 거들떠보지도 않
던 코리의 작은 애완 생쥐 기억나요? 생쥐에게 도넛 조각을 아주 조금 먹였어요. 어떻게 됐을 거 같아요? 죽었어요! 이제 거기 앉아 울면서 내가 누구인지, 크리스가 누구인지, 코리와 캐리가 어떤 아이들이었는지 모른다고 한번 잡아떼보시죠! 그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내 평생에 당신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뉴욕에 발레 공연을 보러 갔을 때만 빼고. 바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재보고, 그다음에 나를 쟀다. 그러더니 눈이 더 가늘어지
며 교활한 표정이 되었다. 캐시, 넌 내 아내에게 아주 심각한 혐의를 씌우고 있어. 살해, 사전 계획한 살해 혐의를 주장하고 있다고. 네가 제대로 증명해낸다면 아내는 살인죄로 배심원 재판을 받게 될 거야. 그게 당신이 바라는 바야? 내가 대답했다. 난 정의를 원해요. 그것 말고는 없어요. 그래요, 난 이여자가 감옥에 갇히는 걸 보거나 전기의자에 앉는 건 원하지 않아요. 이 주에서 아직도 그런 사형 방식을 쓰는지 모르겠지만요.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거짓말하고 있는 거야. 거짓말 거짓말......
나는 이런 주장에 대비를 해 왔고, 내 작은 핸드백에서 출생증명서 네 장을 복사한 종이를 침착하게 꺼내 들었다. 종이를 바트에게 건넸고, 그는 전등 아래로 가서 꼼꼼이 종이를 살폈다. 나는 잔인한 기분과 크나큰 만족감을 느끼며 어머니에게 미소를 지었다. 친애하는 어머니, 그걸, 우리들 출생 증명서를 여행 가방의 안감에 넣어두고 꿰매다니, 참 바보 같기 짝이 없는 짓이었어요. 출생증명서가 없이는 제가 당신 남편에게 보여줄 어떤 증거도 없었을 테고, 의심할 여지도 없이 저 사람은 계속 당신을 믿었겠
지요. 저야 배우이고 좋은 쇼를 펼치는 데 익숙하니까요. 당신이 나보다도 더 훌륭한 배우라는 걸 저 사람이 모른다니 안타까운 일이네요. 도망갈 구석 찾아봐요, 엄마. 하지만 나에게는 증거가 있어요! 나는 눈물이 나도록 미친 듯이 웃어대며, 그녀의 눈에서도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때 그녀를 그토록 사랑했기에 그 모든 증오와 적대감 아래서도 그녀가 안쓰럽다는 마음이 꿈틀거렸다. 뱃속부터 뿌리 깊게 가지고 태어난 사랑의 자그만한 빛은 여전히 차오르고 있었다. 그러고는 사그라졌
다. 아팠다. 그녀를 울게 만드는 건 아픈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런 일을 당해도 쌌다. 정말 그랬다. 나는 그녀가 당해도 싸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또 말했다!
또 아세요, 엄마? 캐리가 길에서 엄마를 만난 얘기를 했어요. 당신은 캐리를 모른다고 잡아뗐고, 캐리는 그 바로 얼마 후부터 아주 심하게 아프다가 죽어버렸어요. 당신도 캐리가 죽는 데 일조한 거예요! 출생증명서가 없었으면 당신은 모든 징벌에서 달아날 수 있었을 거예요. 펜실베이니아 주 글래드스톤 법원이 10년 전에 화재로 무너졌거든
요. 운명이 당신에게 얼마나 친절하게 굴어주는지 알겠어요. 어머니? 하지만 당신은 뭐 하나 잘하는 게 없었어요. 왜 출생증명서를 태우지 않았을까요? 왜 간직해둔 거예요? 참 생각도 없는 짓이었지, 친애하고 사랑스러운 어머니. 증거를 간직해두다니 말이에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엄마는 늘 조심성이 없었어요. 언제나 생각이 짧고, 낭비벽이 엄청나게 심했어요. 당신은 자식 넷을 죽이면 다른 걸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당신의 아버지가 덫을 쳐놨어요. 안 그래요? 캐시! 가만히 앉아서 내가 해결
하게 놔둬! 바트가 명령을 내렸다. 아내는 바로 얼마 전에 수술을 치렀고, 네가 그녀의 건강을 위협하게 내버려두지는 않겠어. 이제 억지로 눌러 앉히기 전에 앉아! 그가 시키는 대로 나는 앉았다. 그는 내 어머니를 보더니, 그다음에 '그녀'의 어머니를 보았다. 그가 말했다. 코린, 나를 아끼는 마음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고 아주 조금이나마 날 사랑한다면, 이 여자가 하는 말이 조금이라도 진실인지 말해줄 수 없겠어? 이 여자 당신 딸 맞아? 어머니가 아주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맞아. 한숨이 나왔다.
온 집안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바트가 내뱉는 한숨과 더불어. 나는 눈을 들어 더없이 기이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말을 이었다. 맞아, 하지만 당신에게 말할 수 없었어, 바트. 말하고 싶었지만, 나한테 자식 네 명이 딸려있고 돈도 한 푼없이 당신에게 다가가면 나를 원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어. 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원했어. 당신과 내 아이들과 돈까지 다 가질 수 있는 해결책을 생각하느라 온갖 머리를 짜내야 했다고. 그녀는 몸을 꼿꼿이 펴고 앉으며 당당
히 고개를 쳐들었다. 허리가 총에 대는 꽂을대처럼 꼿꼿했다. 그리고 해결책을 생각해냈지! 찾아냈어! 몇 주간 조사를 거듭해야 했지만, 그래도 방법을 찾아냈단 말이야! 바트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코린, 살인은 그 어떤 일에도 해결책이 될 수 없어! 내게 말만 하면 되는 일이었어. 내가 당신 자식들을 지키고 유산도 지킬 길을 찾아냈을 거야. 그녀가 대꾸했다. 하지만 모르겠어? 나 혼자서 방법을 찾아냈단 말이야! 난 당신을 원했어. 내 아이들과 돈도 원했어. 내 아버지가 그 돈을 내게 빚졌다고 생각했다고! 그녀
는 그렇게 말하고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웃어졎혔다. 마치 지옥이 발목까지 따라붙었으며, 불길에서 달아나려면 빨리 입을 여는 수밖에 없다는 듯했다. 모든 사람이 내가 멍청하다고, 예쁘장한 얼굴과 몸매에 금발을 하고 뇌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흠, 어머니, 내가 당신을 속여 넘긴 거예요. 그녀는 휠체어에 앉은 노파에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벽에 걸린 초상화를 보고도 소리를 질렀다. 당신도 속여 넘겼어요. 맬컴 폭스워스! 그러고는 내게 눈을 부라렸다. 너도 마찬가지야, 캐서린. 넌 저 위에 갇혀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친구도 못 만나고 하면서 고생고생을 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내 아버지가 내게 한 짓에 비하면 네가 가진 게 얼마나 대단했는지 넌 깨닫지 못하고 있어! 너, 너와 너의 그 비난, 그건 항상 나한테만 향해 있지. 언제 너희를 내보내줄 수 있느냐고? 아래층에서는 아버지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고, 그 말에 따르지 않으면 한 푼도 물려받을 수 없다고 하고, 네 연인에게 네 명의 자식 얘기를 할 거라고 하고! 나는 숨을 죽였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섰다. 우리를 알고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우리
를 알았어요? 그녀가 다시 미친 듯이 웃었다. 다아이몬드마저 금이 가게 할 웃음이었다. 그래, 알고 있었지. 하지만 내가 말한 건 아니야! 크리스(남편)와 내가 이 끔찍한 집에서 도망친 그날로 아버지는 탐정을 붙여서 우리의 동태를 계속 살피게 했어. 남편이 사고로 죽었을 때, 변호사들이 어디서 도움을 구해보라고 날 설득했어. 아버지의 환희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모르겠니, 캐시? 그녀가 말을 너무도 빠르게 하는 바람에 얘기가 이리 뛰었다가 저리 뛰었다가 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나와 내 아이들
이 이 집에 있기를, 그의 손바닥 안에 있기를 원했어! 너희를 평생 가둬놓겠다는 건 그의 계획이었다고!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그녀를 응시했다. 의심스러웠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무슨 수로 믿겠는가? 그토록 허다한 짓을 저지르고 난 후에 어떻게? 그럼, 할머니가 우리에게 한 짓이 할아버지의 계획이었다는 말이에요? 나는 발가락부터 마비가 되는 감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할머니 말이야? 엄마가 중얼거리며 할머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아버지가 말하면 뭐든지 할 분이
지. 날 증오했으니까. 저분은 늘 날 증오했어. 내가 어릴 때 아버지에게 너무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자기가 편애하던 아들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의 덪에 걸려서 우리가 이곳에 오고 나서, 그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흡족해했지, 자기 이복동생의 아이들이 우리 안의 동물처럼 잡혀서 자기들이 세상을 뜰 때까지 갇혀 지낸다는 생각을 하고서 말이야. 그래, 너희가 위에 있는 동안에, 놀이를 하고 다락방을 꾸미고 하는 동안에 그는 나를 하루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지. '절대로 태어나면 안 될 아이
들이었어. 그렇지 않아!' 그녀가 이렇게 말하면서 슬쩍 나를 떴어. 너희가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기다리느니 그냥 지금 죽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나는 처음에는 설마 진심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그저 그분이 나를 고문하는 또 한가지 방법이겠거니 생각했어. 그는 너희가 나쁘고 부족하고 사악한 아이들, 파괴해 없애버려야 할 아이들이라고 매일같이 말했지. 나는 무릎을 꿇고 울면서 애원하고 빌었어. 그러면 그는 콧방귀를 뀌었지. 어느 날 저녁에 그가 불같이 화를 내지 않겠어? '이 천치야, 넌 이복 삼촌
과 잠자리를 한 너를 내가 용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멍청해? 하느님에게 대고 그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너를? 그와 잠을 자고 아이들을 배고 한 걸 말이야?' 그리고 쉬지도 않고 열변을 토하고, 어떨 때는 고함을 치기도 했어. 그러고는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보이는 것이면 뭐든 마구잡이로 쳤어. 근처에 앉은 어머니는 기분이 좋아서 히죽거렸지. 그렇게만 말한 거야. 너희가 위층에 있다는 걸 안다는 내색은 몇 주가 지나가는 동안에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 무렵에 나는 덪에 걸
려 있었어. 엄마는 믿어달라고,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애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어! 돈도 한 푼 없었지. 그리고 나는 저 성질머리에 저러다가 제 풀에 꺾여 돌아가실 거라고 계속 생각했어. 그래서 난 아버지가 아주 돌아가시라고 성질을 건드리곤 했어. 하지만 그는 목숨이 끊어질 기미는 안 보이고 나와 내 아이들을 끝없이 질책했어. 그리고 너희는 너희 방으로 갈 때마다 내보내달라고 아우성을 쳤지. 특히 너, 캐시, 특히 네가! 내가 빈정거리며 대꾸했다. 그분이
우리를 계속 포로로 잡아두겠다고 엄마한테 한 일이 또 뭐가 있나요? 고함을 쳐대고 나무라고, 지팡이로 때린 거 말고 있어요? 노쇠하고 몸도 성치 않은데 힘을 쓰기가 참으로 쉬웠겠네요? 그리고 처음 채찍 자국을 본 다음 날 이후부터는 엄마 몸에서 어떤 자국도 못 봤는데 말이죠. 당신은 원할 때마다 오고 갈 자유가 있었어요. 그분이 알지 못하게 우리를 몰래 빼낼 계획을 마련해볼 수가 있었다고요. 하지만 당신은 그의 돈을 원했고, 그리고 그 돈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상관없었던 거예요! 당
신 자신의 자식 네 명보다 돈을 더 원했던 거지!
내 눈 바로 앞에서 그녀의 섬세하고 새로이 재건한 아름다운 얼굴이 문득 그녀의 어머니처럼 나이를 먹어버렸다. 그녀는 회한과 더불어 아직 살아야 할 숱한 세월을 한꺼번에 살어버린 것처럼 쪼글쪼글해지고 초췌해 보였다. 그녀의 눈길이 이리저리 헤매면서 영원히 숨어들 은신처를 찾고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남편의 눈에 드러난 격분
으로부터도 숨을 길을 찾고 있었다. 캐시. 어머니가 애원했다. 네가 나를 증오한다는 거 안다. 하지만.... 맞아요! 어머니. 난 당신을 증오해요. 하지만 뭐? 이해해 달라는 거예요? 어머니, 당신이 말한 것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내가 이해가 가게 만들어 주는 얘기는 없네요. 코린. 바트가 심장이 들어내진 듯이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딸 말이 맞아. 거기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가 당신 자식들에게 독을 먹이라고 내몰았다고 하는 거야 당신 주장일 뿐이지. 하지만 당신 아버
지가 당신에게 심지어 매서운 눈초리조차 보내는 걸 본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당신 말을 무슨 수로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 그분은 당신을 사랑과 자부심에 차서 바라봤어. 당신은 하고 싶은 대로 여기 왔다가 저기 갔다가 할 수 있었지. 당신 아버지는 당신에게 아낌없이 돈을 퍼 주었고, 덕분에 당신은 새 옷이든 뭐든 당신 원하는 건 모조리 다 사들일 수 있었어. 그런데 이제 당신은 그분이 당신을 어떻게 고문했는지, 어떻게 당신 자식들을 죽이라고 내몰았는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들고 나오고 있어. 세상
에, 당신 참 역겨운 사람이야! 바트의 말에 그녀의 눈이 멀게졌다. 그녀의 파리하고 우아한 손이 떨리며 무릎에서 목 근처로 올라가 가볍게 흔들리며 펴지더니 다이아몬드 초커를 쉬지 않고 만지작거렸다. 그 목걸이는 드레스를 고정하고 있었고, 목걸이가 떨어지면 드레스도 따라 벗겨질 것이었다. 바트, 제발. 나 거짓말하는 게 아니야.....옛날에 거짓말했다는 건 인정할게. 그리고 내 아이들 일도 속였지. 하지만 지금 하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야. 왜 나를 믿지 못해? 바트가 요동치는 바다 위에 힘을 주고 버티
듯이 다리를 벌리고 섰다. 등 뒤로 가져간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내가 어떤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가 씁쓸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말만 했으면 됐어. 난 이해했을거야. 난 당신을 사랑했어. 코린. 법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당신 아버지의 뜻을 좌절시키고 그의 재산을 얻는 일을 어떻게든 도와줬을 거야. 동시에 당신 아이들의 목숨도 살리고. 그리고 난 돈 보고 당신과 결혼한 게 아니야. 당신이 땡전 한 푼 없었어도 결혼했을 거라고! 바트! 그건 아냐! 당신이 우리 아버지보다 한 수 앞서 나갈
도리는 없었어! 그녀가 벌떡 일어서서 서성거리기 시작하며 외쳤다. 반짝이는 진홍색 드레스를 입은 어머니는 환하게, 날름날름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였다. 드레스 덕분에 그녀의 눈은 짙은 보라색처럼 보였고, 그 눈이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가서 꽂혔다. 그러고는 마침내, 자기 어머니에게 눈길이 멈추었다. 나로서는 이제 여왕 같은 자태가 다 사라져버린 그녀의 망가지고 막무가내가 된 모습을 더는 지켜보기가 힘든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뼈가 하나도 없는 듯 휠체어에 흐물흐물 파묻혀 있는 늙은 여
인, 그녀의 옹이 진 손가락은 힘없이 꿈틀거렸지만, 열에 들떠 살아 있는 눈만큼은 강렬하고 비열한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모녀의 눈길이 강렬하게 충돌했다. 그 회색 눈은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바뀌지도, 무뎌지지도 않았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그 눈빛을 앗아 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머니는 이 충돌에 맛서서 몸을 꽂꽂이, 길게, 이 의지의 전투에서 승리한 자의 자세로 솟구쳐 일어섰다. 그녀는 딴 사람 얘기라는 듯, 감정을 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면도가 달린
말 한 마디 한 마디로 자멸해가면서도 마치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더 이상 개의치 않는다는 듯 들렸다. 어쨋건 승리는 결국 내게 돌아갔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가장 가혹한 심판관이 된 나에게 호소의 방향을 돌렸다. 좋아, 캐시. 언젠가는 너와 마주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어. 나한테서 진실을 닦달할 사람이 너 말고 누가 있겠어? 너는 항상 나를 꿰뚫어 봤어. 내가 나라고 믿어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도 너였지. 그리고 내가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고 늘 의심한 것
도 너였어. 내가 너희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 모습과 늘 같지 않다는 걸 넌 알았어. 네 오빠는 나를 사랑하고 믿어 주었어. 하지만 너는 꿈에도 그럴 생각을 하지 않았지. 하지만 처음에는, 네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나도 너를 견뎌보려고 무던히 애썼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애정을 되찾을 때까지 이곳에 와서 숨어 지내라고 너희에게 부탁했을 때는 나도 진짜 그렇게 될 거라고 여겼어. 하루나 이틀 이상 걸릴 거라고 정말로 생각하지 않았어. 나는 얼어붙은 듯 그녀를 응시하며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동정과 연민
으로 자비를 베풀어줘, 캐시, 날 믿어줘! 나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서 눈길을 돌려 자신이 빠진 엄청난 괴로움을 바트에게 호소하며, 한 친구 집에서 이루어졌던 그들의 첫 만남을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고 싶지 않았어, 바트. 그리고 내가 빠진 이 난장판에 당신을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았고, 당신에게 내 아이들 얘기와 그들에게 우리 아버지가 하는 짓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아버지 병세가 악화되고 금방이라도 돌아가실 것 같은 거야. 그래서 할 말이 뒤로 미루어지고 말
았지. 당신에게 털어놓는 날이 오면 당신이 이해해주기를 하늘에 빌었어. 바보 같은 짓이었지. 비밀이란 그렇게 오래가면 설명할 길이 없어지니까. 당신은 나와 결혼하고 싶다지,아버지는 계속 안된다고 하지. 아이들은 날이면 날마다 내보내달라고 애원을 하지. 애들이 당연히 그럴 만하다는 걸 알면서도, 난 아이들이 계속 나를 괴롭혀 죄의식이 들게 만들고, 내가 자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백방으로 다 하고 있는데도 그렇게 나오는 걸 보니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어. 그리고 캐시가 있었어. 항상 캐시가
문제였어. 아무리 선물을 갖다바쳐도, 항상 총대를 멨지. 그녀는 내게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의 고문을 받고 있다는 듯이, 괴로움에 빠진 눈길을 내게 또다시 던졌다. 캐시. 그녀가 촉촉해진 눈가와 고통스럽게 번득이는 눈길로 나를 다시 보며 작게 속삭였다. 난 정말이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어! 부모님에게 너희가 이런저런 병증이 있다고 말했고, 특히 코리가 심하다고 말했어. 그분들은 하느님이 내 아이들을 벌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했어. 그래야 맘 편하게 믿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코리는 사시
사철 감기를 달고 살았고, 알레르기도 있었어. 이제, 내가 뭘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어? 너희 한 명 한 명을 아주 조금씩만 아프게 해서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던 거야. 할머니에게 너희가 죽었다고 말하려고 말이야. 비소를 아주아주 약간씩 쓰기는 했지만, 죽을 만큼은 아니었어! 내가 원했던 건 그저 너희를 조금만 아프게, 이곳에서 나가게 해줄 만큼만 아프게 하는 거였어!. 그걸 방법이라고 생각해낸 그녀의 아둔함에 치가 떨렸다. 그러고는 그것조차 다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줄 모르고 자신을 쳐다
보는 바트를 무마하기 위한 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엄마, 가루 설탕 도넛이 우리에게 오기 시작하기 전에 엄마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 잊으셨나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왜 우리에게 독약을 먹였을까요? 엄마, 엄마가 지금 얼마나 말도 안되는 소릴 한다는 거 아세요? 그녀는 괴로운 눈길로 할머니를 쏘아보았다.
할머니는 자신의 딸을 냉랭하고도 으스스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 엄마가 외쳤다 나도 알지! 하지만 그 유언장 보충서가 아니었다면 비소 따위 쓸 일도 없었겠지! 아버지는 우리의 비밀을 집사 존에게 알렸어. 그를 통해서 아버지는 내가 당신의 말을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고, 너희가 전부 죽을 때까지 2층에 가둬두는 걸 살아서 계속 보려고 했어! 만약 당신이 볼 수 없다면, 어머니가 그 일을 확실히 해주기로 했지. 집사에게 일을 하는 댓가로 5만 달러를 주기로 약속했거든. 그런데 거기에다 우
리 어머니는 존에게 모든 걸 다 물려주고 싶어 했어!. 내가 무슨 말인지 곱씹어보고 있는 동안에 끔찍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할아버지는 내내 알고 있었고, 우리를 평생 가둬둘 생각을 했다고? 그러고는 그만한 벌로도 모자라서 그녀로 하여금 우리를 죽이게 하려고 했다고? 아, 그렇다면 멜컴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사악한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인간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를 보면서 맡은 낌새는, 그녀의 푸른 눈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말을
하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눈은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했는데, 내 어머니가 한 말을 모조리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엄마를 증오했다. 그녀는 내가 최악을 믿기를 원했다. 아, 하느님. 내가 뭐라고 진실을 발견 할 수 있겠나이까? 나는 벽난로 앞에 서 있는 바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은 내가 전에 본 적이 없던 눈길로 자신의 아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그것이 끔찍하다는 표정이었다. 엄마. 나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코리의 시신, 정말로 어떻게 한 거예
요? 크리스와 함께 병원 기록도 알아봤고 주변에 있는 공동묘지를 샅샅이 살펴봤지만 여덟 살짜리 남자아이가 1960년 10월 마지막 주에 죽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녀가 먼저 침부터 삼키더니 다이아몬드와 다른 온갖 보석이 번뜩거리는 손을 쥐어짰다. 어...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어. 갑자기 숨을 멈추었고, 뒷좌석을 보니까 죽었다는 걸 바로 알겠더라. 그녀가 기억에 잠겨 흐느꼈다. 그때 난 나 자신이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 살인죄를 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았지. 그
리고 난 걜 죽일 생각이 없었단 말이야! 약간 아프게만 할 생각뿐이었지! 그래서 산골짜기에 그 애를 던져놓고 낙옆하고 나무 막대기와 돌로 덮었어....그녀의 거대하고 절망적인 눈이 믿어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나도 침부터 삼켜야 했다. 어느 깊은 골짜기에서 썩었을 코리를 생각하며. 아니에요, 엄마, 그랬을 리가 없어요. 코리가 그렇게 죽은것도 억울한데 시신을 산에다 버려요? 당신....내 입술은 파르르 떨렸고 온몸에도 소름이 돋고 있었다. 나는 터지려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아..아까
여기 내려오기 전에 그 북쪽 끝 방에 갔다 왔어요. 계단을 내려와 당신과 대면하기 전에 다락방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계단부터 올라가 봤어요. 그러고는 우리 감옥의 벽장에 숨겨진 작은 계단을 통해 올라갔고요. 당시 크리스와 난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또 다른 길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왔어요. 저 커다랗고 육중한 장롱들 뒤에 문이 있을 거라고 제대로 짐작했죠. 장롱들은 아무리 힘을 써서 밀어보려고 해도 밀리지 않았었죠, 엄마....전에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작은 방을 발견했어요. 한 점의 빛조
차도 없는 암흑의 방에는 아주 희한한 냄새가 났어요. 뭔가 죽은 악취가. 잠시 동안 그녀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내 말에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머리채를 쥐고 마구 흔들었다. 이 악마! 그때 코리의 시신을 다락방에다 버렸어! 엄마가 사람이야! 죽어! 죽어! 당신도 죽어! 나는 닥치는 대로 그녀를 머리를 거칠게 흔들고 손으로 그녀를 마구잡이로 두들겨 팼다. 순식간이었다. 바트가 달려들어 나를 뜯어 말렸다. 캐시! 그만둬.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
사람들은 길거리의 싸움을 구경하 듯 했다. 그때 누군가가 방에 들어섰다. 크리스였다. 나는 바트의 손에 잡혀 엄마에게서 떨어졌다. 어머니는 간신히 몸을 추스리며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휘휘저으며 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크...크리스,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야. 정말로 아니야!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마요. 난 아이들을 사랑했어요! 아이들에게 비소를 주려고 했던 게 아니야. 하지만 아버지가 그러라고 시켰어! 애들이 아예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다고요! 아버지는
아이들이 너무도 사악하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고 말했어. 그게 내가 당신과 결혼하면서 저지른 죄를 보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그녀는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빠 크리스를 죽은 남편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외모가 너무도 닮은 크리스, 이젠 장성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내가 엄마를 쏙 빼 닮은 것과 같이, 제정신이 아닌 그녀가 착각할 만도 했다. 크리스가 계속 고개를 젖고 있었지만, 그녀는 뺨으로 눈물을 철철 흘리며 계속 말했다. 난 내 아이들을 사랑했단 말이야! 우리 아이들을! 하지
만 내가 어쩔 수 있었겠어? 그냥 조금만 아프게 하려고 한 거야. 아이들을 구출해낼 정도로만. 그게 다야. 그게 다라고....크리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내가 우리 아이들을 죽일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거 당신도 잘 알잖아! 그녀를 응시하는 크리스의 눈이 얼음장 같은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고의적으로 비소를 먹였다는 얘기군요? 이 집에서 벗어나 생각해볼 시간이 났을 때도 어머니가 정말로 그랬다고는 다 믿기지 않았어요. 하지만 정말로 어머니가
한 짓이었어! 그의 말에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일어섰다가는 정신이 나간 듯이 무너져 내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런 비명 소리는 난생처음 들었다. 정신병자의 울부짖음처럼 들리는 비명이었다. 그녀는 발길을 돌려 계속 비명을 지르며 어떤 문으로 달려가더니, 그 뒤로 사라졌다. 나로서는 그런 문이 있는 줄도 몰랐던 문이다. 캐시. 문가에 서 있던 크리스의 눈에 눈물이 고였고, 서재를 둘러보다가 바트와 할머니를 보았다. 캐시, 널 데리려 왔어. 안 좋은 소식이 있어. 클레어몬트로 곧장 돌아가야해! 내가 대답
하기도 전에 바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캐시의 오빠 크리스인가? 네, 그래요. 캐시를 데리러 왔어요. 우린 어디 다른 곳에 좀 가야 해요. 내가 크리스에게 다가갔고 그가 손을 뻗었다. 잠깐! 바트가 말했다. 몇 가지 질문을 해야겠어. 온전한 진실을 알아야겠단 말이야. 저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자네 어머니가 맞나? 바트의 물음에 크리스는 나부터 쳐다보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 바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제야 크리스는 적개심이 담긴 눈으로 바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요,
나와 캐시의 어머니가 맞습니다. 그리고 코리와 캐리라는 이름의 쌍둥이에게도 한때 어머니였구요. 바트가 되물었다. 그녀가 네 명을 다 한 방에 가둬놓고 3년을 넘게 있었고? 그래요. 정확하게는 3년하고 4개월하고 16일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코리를 데려가더니, 나중에 돌아와 그가 폐렴으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지금은 다른 데 신경 쓸 일이 생겼어요. 가자, 캐시. 그가 다시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서둘러야 해! 그러고는 할머니를 쳐다보더니 일그러진 얼굴
로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 즐거운 성탄절이에요, 다시는 뵙지 않기를 바랐는데, 이제 보니까 시간이 알아서 복수를 해주었군요. 그가 다시 나를 보았다. 서둘러, 캐시 코트 어디다 뒀어? 조리와 린드스트롬 아줌마가 내 차에 있어. 도대체 무슨일이 생겨서 크리스가 이렇게 황급하게 찾아와서 서두를까? 무슨 일이 터진 걸까? 그때 바트가 가로막았다. 안돼! 캐시는 떠날 수 없어! 이 여자는 내 아이를 가졌고, 난 이여자가 이곳에 나와 함께 있어주기를 원해! 바트가 다가와 나를 품에 안고 사랑을 담은 눈길로 내 얼
굴을 들여다보았다. 캐시, 네가 내 눈에서 장막을 걷어냈어. 네가 옳았어. 난 당연히 이 따위보다는 나은 상황에 있어야 해. 변하기 위해 뭔가 쓸모 있는 일을 하며 내 존재를 만회할 길이 아직 있을지도 몰라. 나는 할머니에게 승리에 찬 눈길을 보냈고, 크리스에게서는 시선을 피했다. 바트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고, 우리는 서재와 할머니를 떠나 그 많은 방을 지나쳐 웅장한 현관으로 나왔다. 근데 밖은 난리법석이 나 있었다. 모든 사람이 이리뛰고 저리뛰며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었다. 연기! 연기 냄새가 났다.
세상에, 집에 불이 났어! 바트가 외쳤다. 그가 크리스에게 나를 밀었다. 밖으로 데리고 가서 안전한 곳에 데려다 줘! 난 아내를 찾아야 해! 그가 그녀의 이름을 외쳐 부르며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코린,코린, 어디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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