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s

세월호의 진실을 외면하는 세력은 누구인가.

Hopefortomorrow 2021. 4. 18. 07:22
참사 7년… 진실은 사라지고 음모와 선동만 난무했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입력 2021.04.17 03:00 | 수정 2021.04.17 03:00

고대 그리스의 도시 테베에 왕과 아내가 살았다.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는 신탁이 있었지만 아들을 낳았다. 부부는 고심 끝에 아기를 죽이기로 하고 발에 꼬챙이를 꿰어 산에 버렸지만, 아이는 구조돼 성인이 되었다. 그러고는 델포이 신전에 찾아가 물었다. ‘신이여, 저는 누구입니까?’ 신은 엉뚱하고도 끔찍한 소리를 했다. ‘너는 네 아버지를 죽이고 네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 예언은 결국 이루어진다. 독자 여러분도 모두 아실 오이디푸스 신화의 내용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너무도 친숙했을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아테네의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는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네 자녀를 낳고 모든 이의 존경을 받던 오이디푸스가 본인의 정체를 파헤치며 스스로를 파괴하고 몰락하는 비극, 을 써내려갔던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을 일종의 추리물로 구성했다. 테베에 역병이 돌고 있다. 전 국왕을 시해한 범인이 테베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현직 왕인 오이디푸스는 범인을 수배한다. 그러자 어떤 현자가 나타나 그 범인은 바로 당신이라고 지목한다. 그럴 리가 없다며 반박하고 새로운 증인을 불러오는 가운데 오이디푸스가 평생 궁금해하던 스스로의 정체가 드러난다. 국왕을 죽이고 어머니와 근친상간한 범인은… 나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압도적인 스토리텔링에 매료되었다. 인류 최초의 문예 비평이라 할 수 있는 에서 을 비극의 모범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대단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신분이 높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운(티케, tyche)에 휩쓸리는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아, 결함이나 실수 등을 뜻하는 과실(하마르티아, hamartia)로 인해 행복에서 불행으로 굴러떨어지는 완결성 있는 이야기.

우리는 모두 운명의 장난에 놀아나는 나약한 존재다. 알건 모르건 스스로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질 낮은 비극은 그런 인간적 조건을 망각하게 만들어, 관객의 영혼을 타락시킨다. 그러므로 쉽게 욕할 수 있는,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주인공을 세워놓고 뻔한 권선징악극을 만드는 것은 미적·윤리적으로 가치가 없는 일이다.

반면 좋은 비극은 어떨까. 을 보던 그리스의 관객 중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2000년이 넘도록 수많은 이들은 감동을 느낀다. 마치 자신이 겪는 일처럼 두려움에 떨고 전율하고 비탄에 빠지고 헤어나오면서 ‘영혼의 정화’, 즉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만취 후 구토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배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술과 음식을 게워내고 나면 평정을 되찾고 건강한 몸을 회복한다. 비극을 보며 통곡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영혼이 정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의 의미다. 요즘 흔히 말하는 ‘사이다’와는 전혀 다르다. 정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악한 자가 벌받는 이야기로는 부족하다. 인간적 한계와 모순을 지닌 우리 스스로를 돌이켜보게 하는 이야기야말로 비극으로서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

7년 전, 어제. 바다가 304명의 목숨을 삼켰다. 그중 250명은 수학여행길에 올랐던 안산 단원고 학생이었다. 몇 번을 곱씹어봐도 참담한 이 사건에서 확인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불법 개조로 무게 중심이 턱없이 높아진 낡은 배. 조타 장치의 일부인 솔레노이드 밸브의 고장으로 인해 우현 37도로 돌아가 고정되어버린 방향타. 엉성하게 묶여 배가 기울면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과적 화물. 승객을 구조하지도 갑판 위로 유도하지도 않은 채 자신만 살겠다고 도망친 선장과 선원들.

가장 나쁜 우연과 있어서는 안 되었을 과오가 겹쳤다. 온 국민의 영혼에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 사건에 대한 잘못을 따지고 책임을 묻는 과정이 필요했다. 더 중요한 건 세월호 참사를 우리 사회의 ‘비극’으로 받아들였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카타르시스, 영혼의 정화에 도달했어야 했다.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기습적으로 해경 해체를 발표하자, 일부 국민 사이에 청와대가 ‘꼬리 자르기’를 한다는 의혹이 퍼져나갔고, 김어준으로 대표되는 음모론자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폭침설, 좌초설, 심지어 미군 핵 잠수함과의 충돌설 등 온갖 황당무계한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세월호가 침몰하게 된 과정에는 수수께끼가 없다. 통상적인 선박 전문가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원인으로 벌어진 사고였다.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에서 인양한 선체를 분석해본 결과 솔레노이드 밸브가 고착되었다는 사실까지 확인됐지만 어떤 이유로 공식적인 발표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미 ‘진실’은 인양되었다. 그것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 이들이 있을 따름이다.

세월호 참사의 진정한 미스터리는 따로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체 왜 팽목항 분향소 방명록에 “미안하다. 고맙다”고 쓴 것일까? 나는 어떤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장소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향해 ‘고마움’이라는 감정이 왜 생기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을 뿐이다. 그들에게 세월호 참사란 도대체 무엇인가.

은 진실 때문에 파괴되는 한 인간을 다룬 비극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한 인간을 그려낸 작품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는 탐정처럼 범인의 정체를 추적하며, 그게 본인임을 깨달은 후, 브로치로 눈을 찔러 스스로를 응징한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상태에 놓여 있었지만 진실을 향한 끝없는 의지로 자신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면 진정한 비극만이 선사하는 묵직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세월호 사망자의 명복을 빈다. 유족과 부상자의 회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또한 우리 사회가 이 비극을 비극으로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기를, 정화된 영혼으로 내일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