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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형 정치 모리배 김원웅

Hopefortomorrow 2021. 5. 9. 07:56


윤주경 “지금껏 이런 광복회는 처음...편가르기로 국민 분열 주도”

최보식 <최보식의 언론> 편집인

입력 2021.05.09 05:55 | 수정 2021.05.09 05:55

윤주경 의원

윤봉길 의사의 장손녀인 윤주경 의원에게 전화하니, “광복회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라고 되물었다.

“기자들이 이 사안에 대해 물으면 아무 답도 안 했어요.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인데 제가 뭐라고 말하면 결국 내 얼굴에 침 뱉기잖아요.”

-문재인 대통령이 ‘지금껏 한 번도 경험 못한 나라’를 만들었듯이, 김원웅 회장은 광복회를 그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광복회가 이처럼 정치 편향 논란과 시비에 휘말린 적은 없었는데?

“정말 이상하게 변질됐습니다. 지금까지 광복회는 이렇게 정치 편향이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저 지경으로 가는데 그냥 모른 체하기도, 그렇다고 사사건건 말하기도 뭐해요. 광복회 내부에서 자정(自淨)이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광복회장 김원웅

-김원웅 회장이 취임한 뒤로 광복회는 ‘우리시대 독립군 대상’을 제정해 민주당 설훈·우원식·안민석·송영길 의원 등에게 줬습니다. 추미애 전 장관에게는 독립운동가 ‘최재형상’을 시상했지요. 수상 자격 여부를 떠나, 여당의 광복회, 현 정권의 광복회처럼 비쳤을 겁니다.

“어디까지 얼마나 더 갈 수 있는지, 아예 갈 데까지 가봐야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지난달 임시정부수립 기념식에서 김원웅 회장이 결국 봉변을 당했지요. 임시의정원(임시정부 입법기관) 의장을 지낸 김붕준 선생의 손자인 김임용 회원이 멱살을 잡았습니다. 그는 “광복회는 정관(定款)에 ‘정치 중립’이 명시돼 있는데 김원웅 회장이 관변 단체처럼 만들었다”고 했지요?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 봉변

“김원웅 회장이 정치 편향 시상식에 임시의정원 태극기를 사용해온 게 폭발 원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자기 할머니가 만든 태극기가 명예로운 자리에 쓰이면 좋은데, 저 장면에서 왜 저런 자리에서 사용되느냐며 속상하셨겠지요.”

-광복회 집행부는 김임용씨를 명예 실추를 이유로 징계를 했는데?

“정작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의 명예를 누가 실추시켰습니까. 징계를 한들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 있습니까.”

-얼마 전 김원웅 회장 체제의 광복회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냈지요?

“광복회의 사업 목적은 ‘국민화합’이라고 돼있습니다. 지금 광복회는 친일적폐청산을 내걸고 편 가르기로 국민 분열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도 독립이지만 되찾은 나라를 지키는 것도 독립입니다. 과거와 같은 편가르기와 분열을 미래세대에게 또다시 물려줘서는 안 되잖아요. 이는 독립운동 정신에 역행하는 일입니다.”

-윤 의원이 성명서를 내자, 다음날 광복회 지부장들이 “부끄러운 줄 알고 나대지 말라”고 반박 성명을 냈지요?

“이렇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도 다 감싸 안아야 할 독립운동가 후손들입니다. 결국 내 얼굴에 침 뱉기가 됩니다. 성명서를 낼 때도 정말 고민이 많았습니다. 광복회가 좀 변했으면 좋겠는 마음으로 참다 참다못해 그렇게 한마디 한 겁니다.”

-윤 의원에 대해 ‘박근혜 품에 안겼다’고 정치적 공세도 했는데?

“그런 김원웅 회장은 공화당과 민정당에 안기고, 노무현 품에도 안겼나요.”

-김원웅 회장은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했지요?

“많이 배우고 처세도 잘 하고 머리도 좋은 분인데, 추구하는 방향이…. 이런 식의 광복회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피해를 줍니다. 현 정권이나 여당에도 별로 도움 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김원웅 회장 때문에 곤혹스러워할 겁니다. 컨트롤이 되는 인물도 아니고….”

-김원웅 회장과는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습니까?

“공식석상에서는 봤겠지만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습니다.”

-과거에는 광복회장의 발언이면 경청하는 시늉이라도 했지요. 그만큼 말의 무게와 품격이 있었지요. 지금은 정치판에서 남발하는 발언처럼 돼버렸지요.

“광복회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지고 ‘겨우 저 정도 단체냐’며 실망하게 된 겁니다. 이게 가장 큰 손실입니다. 지난 광복회장 선거에서 김원웅 씨를 지지한 대의원이나 지부장들이 ‘이건 아니다’ 싶어 건의나 비판을 했다가 쫓겨나거나 스스로 그만둔 분들이 꽤 있다고 들었습니다.”

-선거에서 김원웅 회장을 지지한 이들도 그렇다는 건가요?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 씨나 백범의 손자 김진 씨도 도저히 말이 안 먹히니까 광복회 직책을 그만뒀다고 들었습니다. 국민 눈에는 독립유공자 후손끼리 싸우는 것으로밖에 안 비칩니다. 광복회에는 무슨 먹고 살 판이 났다고 그러느냐 하지 않겠습니까.”

-윤 의원은 광복회원입니까?

“독립유공자 집안에서 한 명만 회원이 됩니다. 저는 7남매 중 장녀이고, 열두 살 차이 나는 막내 남동생이 회원입니다. 광복회원의 수는 8천여 명이 됩니다.”

윤봉길 의사

그녀는 성장 과정에서 ‘누구의 손녀’로 사는 걸 원치 않았다고 했다. 주위에서 수군거려도, 자기 입으로 ‘우리 할아버지는 누구’라고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그녀와 이런 문답을 나눈 적이 있었다.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면 자부심을 가졌을 법한데 왜 감추려고 했나요?

“독립운동가 후예의 삶은 단정하고 모범적이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솔직히 떨쳐버리고 싶은 부담 같은 것이었지요. 어렸을 때 마음의 상처도 있었고….”

-마음의 상처라니?

“우리는 고향 예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 와 살았어요. 살림이 어려웠지요. 한 번은 친구 집에 놀러 가니, 친구가 엄마에게 소개한답시고 ‘누구 손녀래’라고 속삭이자 ‘저런 애와 왜 노니’ 하는 말이 들렸어요.”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아마 우리 같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남에게 손을 내밀고 공짜만 바라는 걸로 비쳤을까요. 할아버지를 팔아먹고 사는 사람 같은…. 그때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어요. 누구의 손녀로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집안에서 ‘누구의 자손이니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훈육도 있었겠지요.

“혹시라도 남들에게 비난을 받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특히 아버지는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스러웠어요. 많은 고민을 안고 살았을 겁니다. 할아버지로 인해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나쁜 아이’로 구박을 받았어요. 학교에서는 소위 ‘왕따’를 당한 거죠. 하지만 광복(光復)이 되자 갑자기 ‘훌륭한 집안 아들’로 바뀌었어요. 세상이 달라지니 갑자기 평가가 달라진 것이죠. 아버지는 이런 세상인심의 표변(豹變)에 겁을 냈어요.”

-세상인심의 표변이라?

“광복 직후 김구 선생님도 집으로 찾아오셨고, 어떤 이들은 쌀자루도 두고 갔다고 해요. 하지만 뒷전에서는 할머니를 향해 ‘남편 뼈를 팔아서 먹고 산다’는 수군거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6·25가 터진 뒤 세상이 다시 바뀌었어요. 이런 걸 겪다 보니 누구도 완전히 믿지 못했어요.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부친은 무슨 일을 하셨지요?

“농림부 양정국(糧政局)에서 근무했어요. 생활면에서는 무력한 편이었죠. 하지만 1987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우연히 어느 분이 ‘내가 청탁한 적 있는데 안 들어주고 참 바르셨다’고 말해줬어요. 그게 자랑스러웠어요. 집안 생계는 엄마가 모두 감당했어요.”

-모친이 생활을 도맡았다고요?

“엄마는 김포공항에서 분식 가게를 했어요. 거기에 우리 식구가 매달려 살았던 셈이죠. 다행히 제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 국가유공자 자녀에게 학비를 면제해 주는 제도가 생겼어요. 이 덕분에 우리 남매들이 다 대학에 진학하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친일파는 후대에도 영화(榮華)를 누리고, 독립운동가 집안은 대대로 가난하다고들 하지요.

“누가 할머니에게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고 하면, ‘다들 어렵게 살았을 때니 그렇게 살았다’고 답변했어요. 어떤 어려움도 내색을 안 했어요.”

-조상이 친일파였다는 걸로 특정 인물에 대한 공격이나 낙인을 찍는 풍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런 후손을 직접 만난 적이 없어요. 다만 누군가에게서 ‘우리 할아버지가 친일파였다. 당신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꼭 전하고 싶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한 번 받은 적은 있었어요. 조상의 행적으로 인해 후손이 사회를 위해 활동하고 기여하는 걸 막아서는 안 돼요. ‘주홍 글씨’를 붙이는 풍토는 옳지 않다고 봅니다.”

-일제강점기는 36년 계속됐어요. 이에 저항한 독립운동가들이 예외적이고 특별한 인물입니다. 국민 대다수는 일본에 순응하고 협조했을 겁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일지 모르지요.

“당시 한반도에 남았으면 그런 삶을 살았을 겁니다. 할아버지(윤봉길)가 중국으로 떠난 이유도 거기에 있었어요. 그래서 친일 행적을 가르는 것에 대해 조심스럽습니다.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거죠.”

내가 윤 의원을 알게 된 지는 7년쯤 됐다. 여리고 착한 성정을 가졌다. 누구와 한판 대결을 하거나 강한 발언을 하는 쪽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일 거다.

“김원웅 체제의 광복회가 걱정스러워 나섰지만, 솔직히 지루한 싸움의 출발점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하루 이틀로 끝나지 않을 것 같고…. 저는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처세에 능하지도 않고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